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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마크롱이 메르츠의 러 동결자산 우크라 지원 반대한 이유

유럽은 무엇을 결단하지 못했고, 그 공백은 누가 채우는가
러시아 동결자산 논쟁이 드러낸 EU 권력 재편, 트럼프 2기 미국의 시선, 그리고 한국이 읽어야 할 전후 질서의 균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사진=AP통신·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사진=AP통신·뉴시스
최근 러시아 동결자산 처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유럽의 양대 강국인 프랑스와 독일 정상들 간 갈등은 유럽의 자유주의 질서 내 균열의 시작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유럽의 균열은 이번 갈등처럼 큰 요란 없이 조용히 시작된다. 전면적인 반란도, 공개적 결별 선언도 없다. 대신 공식 문서 뒤편에서의 미세한 방향 전환, 합의 직전의 침묵, 그리고 이번 갈등처럼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좌초가 반복되면서 균열이 일어난다. 2100억 유로에 달하는 러시아 중앙은행 동결 자산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활용하자는 독일의 제안이 무산된 과정은 바로 이 유럽식 위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사안은 단순한 재정 논쟁이 아니다. 이는 유럽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어떤 성격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전후 질서를 설계할 의지와 능력을 아직 보유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그 시험에서 유럽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러시아 자산 논쟁의 본질: 돈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책임의 문제

독일 총리 메르츠가 제안한 구상은 명확했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발생한 피해를 러시아의 국가 자산으로 보전하자는 논리였다. 이는 법적 논쟁을 수반했지만, 정치적·도덕적 측면에서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침략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원칙을 제도화하겠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구상이 좌초된 이유는 법률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비공식 채널을 통해 재정 보증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흘렸고, 벨기에와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조용히 합의를 무력화했다. 이 과정은 유럽이 가장 꺼리는 방식, 즉 공개적 분열을 피하면서도 실질적 결단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 있다. 유럽은 러시아를 상대로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행사하는 데 따르는 책임을 떠안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균열: 유럽 리더십 구조의 이동


이번 사안은 독일과 프랑스의 역할 교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메르츠 체제의 독일은 방위비 증액, 군사력 재건, 지정학적 책임 확대를 통해 유럽의 전략적 중심을 자임하고 있다. 반면 마크롱의 프랑스는 재정 압박과 국내 정치 불안 속에서 전략적 결단을 미루고 있다.

이 변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유럽 내부에서 ‘말하는 프랑스’와 ‘결정하는 독일’의 역할 분리가 가시화되고 있다. 문제는 유럽 통합 구조가 이 역할 전환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주저하는 순간, 유럽 전체가 멈춘다.

이 균열은 개인 간 갈등이 아니라 구조적 충돌이다. 재정 여력, 정치 안정성, 전략 문화가 서로 다른 국가들이 하나의 외교·안보 결단을 내려야 하는 구조 자체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시선: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보는 유럽의 현실

이 장면을 미국은 매우 냉정하게 보고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시각에서 유럽의 이번 모습은 익숙한 장면이다. 말은 많지만 책임을 나누는 데는 소극적이고, 결정의 순간에는 합의가 무너지는 모습이다.

미국에게 이 사안은 단순한 유럽 내부 문제를 넘어선다. 우크라이나 지원의 지속 가능성, 러시아 억지의 신뢰성, 그리고 미국이 유럽 안보에 계속 개입해야 할 명분과 비용 구조가 모두 이 문제와 연결돼 있다.

유럽이 러시아 자산 활용이라는 비교적 ‘비군사적’ 수단조차 합의하지 못한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더 큰 안보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신호로 읽힐 수밖에 없다. 이는 트럼프식 거래 외교의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러시아가 얻는 전략적 이익: 단결 실패는 곧 시간의 선물

러시아는 이 상황을 매우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다. 유럽이 결단을 미루는 동안, 러시아는 시간을 벌고 있다. 제재의 틈을 이용해 그림자 선단을 운용하고, 북한과의 군사 협력을 확대하며, 전쟁 비용을 분산시키고 있다.

유럽의 비결단은 러시아에게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전략적 지속성을 제공한다. 전쟁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지금 러시아 편으로 기울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현실: 지원 피로와 전략적 모호성의 교차점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번 사안은 단순한 재원 문제를 넘어선다. 이는 유럽이 끝까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무기 지원, 재정 지원, 재건 계획이 모두 장기전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는 상황에서, 핵심 국가들의 주저는 치명적이다.

전쟁은 군사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정치적 의지와 예측 가능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는 순간, 전장의 계산도 달라진다.

국제 질서의 균열: 전후 질서는 자동으로 오지 않는다

이번 사건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전후 질서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비용을 지불하고, 책임을 떠안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유럽은 그 역할을 미국이 대신해 주길 기대해 왔고, 미국은 점점 그 역할에서 물러나려 한다. 이 공백이 길어질수록 국제 질서는 불안정해진다.

한국이 읽어야 할 교훈; 동맹은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결코 관찰자일 수 없다. 유럽의 단결 실패는 한국에게도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동맹은 선언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 누가 얼마나 비용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동맹의 실체를 결정한다.

한국은 미국 중심 질서가 여전히 유효한지, 그리고 그 질서가 언제까지 자동으로 작동할지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외교·안보·금융 전략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시대는 끝났다.

금융과 안보의 연결: 자본은 전략을 따른다


러시아 자산 논쟁은 금융이 더 이상 중립적 영역이 아님을 보여준다. 자본의 흐름은 정치적 결단을 반영한다. 자산을 어떻게 보호하고, 어떻게 동원하며, 어떻게 위험을 분산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국가 전략의 핵심이다.

유럽의 주저, 세계의 경고


러시아 동결 자산을 둘러싼 유럽의 갈등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경고다. 결단을 미루는 질서는 오래가지 못한다. 책임을 분산시키는 전략은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로 이어진다. 지금 세계는 다시 묻고 있다. 누가 질서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가. 누가 비용을 지불할 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누가 그 공백을 메울 것인가.

한국이 이 질문을 외면한다면, 언젠가 그 질문은 한국을 향해 돌아올 것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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