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위한 베를린 협상에서 드러나고 있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 간 힘과 억제, 동맹의 새로운 질서는 무엇인가
베를린 협상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 같은 새로운 질서의 등장이 미국으로 하여금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동아시아적 함의와 한국에 주는 분명한 신호를 읽어야
베를린 협상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 같은 새로운 질서의 등장이 미국으로 하여금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동아시아적 함의와 한국에 주는 분명한 신호를 읽어야
이미지 확대보기전쟁의 끝을 말하는 회담, 그러나 더 큰 질문의 시작
지난 12월14일 베를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 미국의 스티프 윗코프 특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를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 정상들 간 회담은 단순한 전쟁 종식 논의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메르츠 총리가 표현한 것처럼 지금의 외교적 진전은 아직 작은 식물에 불과하지만, 그 뿌리가 어디로 뻗어갈지는 국제질서 전체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이 회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가능성을 처음으로 현실적인 외교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전후 세계질서가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번 회담의 핵심은 휴전 그 자체보다도 휴전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그 유지 장치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있다. 유럽이 제안한 다국적 군사력, 미국이 주도하는 검증과 감시 체계, 나토식 안보 보장에 준하는 장치들은 모두 전쟁 이후의 세계가 더 이상 규범과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평화는 다시 군사력과 억제력, 그리고 명확한 힘의 배치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냉혹한 인식이 베를린 회담의 기저에 깔려 있다.
유럽의 귀환과 자유주의 질서의 변형
베를린 회담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유럽의 역할 변화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만 해도 유럽은 미국의 전략을 추종하는 위치에 가까웠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국의 전략적 초점이 점차 인도태평양으로 이동하면서, 유럽은 스스로의 안보를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유럽 정상들이 제안한 유럽 주도 다국적 군사력은 이러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는 나토의 해체나 약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토가 더 이상 유럽만의 조직이 아니라 글로벌 전략 플랫폼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한 조정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자율적 군사 역량을 확대하고, 동시에 미국과의 전략적 분업을 재정의하려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본래의 이상주의적 형태에서 점차 변형되고 있다. 영토 문제에 대한 원칙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현실적 타협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태도는 규범과 힘의 절충이라는 새로운 질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냉전 이후 유지돼 온 자유주의 패권 질서가 현실주의적 요소를 대거 흡수하며 재구성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계산과 전선의 재배치
베를린 회담에서 미국이 보여준 적극성은 단순히 우크라이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팀이 전면에 나서 안보 보장과 휴전 구조를 설계하는 모습은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미국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더 이상 유럽의 문제가 아니라,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더 큰 게임판의 한 축이다.
미국이 러시아와의 직접 충돌을 피하면서도, 러시아가 서쪽으로 더 확장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러시아를 완전히 붕괴시키기보다는 관리 가능한 위협으로 묶어두고, 미국의 전략적 자원을 인도태평양으로 전환하려는 계산과 맞닿아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미국 측 발언은 이러한 전략을 뒷받침한다. 이는 나토 가입이라는 군사적 선을 넘지 않는 대신,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서방 질서에 편입시키는 방식이다. 군사적 충돌을 최소화하면서도 질서의 방향성을 고정하려는 미국식 타협의 전형이다.
러시아의 시간 끌기와 회색지대 전략
영국 MI6 국장이 지적했듯, 러시아는 협상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회색지대 전술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더 이상 전통적인 군사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대신 사이버 공격, 에너지와 물류에 대한 압박, 사회적 불안 조성 같은 비군사적 수단을 통해 상대의 결속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세계가 평화와 전쟁의 경계가 흐려진 상태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전면전은 줄어들 수 있지만, 갈등의 밀도는 오히려 높아진다. 베를린 회담에서 논의된 감시와 검증 체계는 단순한 군사적 휴전 감시를 넘어, 이러한 회색지대 위협까지 관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문제를 넘어선 동아시아적 함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논의는 유럽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직접적인 함의를 갖는다. 특히 미국이 유럽 전선의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움직임은 인도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곧 중국을 향한 미국의 압박이 더 정교하고 일관된 형태로 강화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유럽이 자율적 안보 역량을 강화하고, 미국이 이를 뒷받침하는 구조는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호주, 한국이 어떤 역할을 요구받게 될지를 예고한다. 미국은 더 이상 모든 전선을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 대신 동맹국들에게 더 큰 책임과 역할을 요구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논의된 다국적 군사력 모델은 장차 동아시아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 주는 절제된 그러나 분명한 신호
이번 베를린 회담이 한국에 직접적인 정책 변화를 즉각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몇 가지 분명한 신호를 던진다. 첫째, 안보 보장은 선언이 아니라 구체적 구조와 실행 능력을 요구받는 시대가 왔다는 점이다. 둘째, 미국은 동맹을 보호하지만 대신 동맹의 자율성과 책임을 동시에 요구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와 같은 전면전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지만, 한반도 역시 휴전 상태라는 점에서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 베를린에서 논의된 휴전 감시, 검증, 억제 메커니즘은 장기적으로 한반도 정전체제 논의에도 참고 사례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한국이 취해야 할 대응은 정밀한 관찰과 준비다. 유럽이 보여준 것처럼, 스스로의 안보 역량을 강화하면서도 미국과의 전략적 조율을 유지하는 이중 접근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해나감으로써 미국의 신뢰를 통한 자체 핵무장을 실현하는 등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역내 질서를 미국과 함께 설계하는 대전략을 추진하는 '전략국가(a strategic nation)'로의 도약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작은 식물의 성장 방향을 읽어야 할 시점
베를린에서 시작된 평화 논의는 아직 불완전하고 취약하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전후 세계질서는 더 이상 단일한 패권이나 규범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다. 힘의 분산, 역할의 재배치, 그리고 지역별 책임 강화라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방식은 앞으로 다른 지역 분쟁의 전형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베를린 회담은 과거를 정리하는 회담이 아니라, 미래의 질서를 예고하는 회담이다. 이 작은 식물이 어떤 나무로 자랄지, 그 그늘이 어디까지 드리울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해 동아시아 역내 질서를 설계해나가는 전략국가로서 베를린 회담을 계기로 동아시아 질서가 어떻게 바뀌어 나갈 것인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대응 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 현 진보 정부가 이 같은 전략적 대응을 할 의지도 없거나 역량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학계와 언론 등 '전략 담론 시장'이 그 같은 전략적 대응 임무를 맡아야 할 것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