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평화안 나토식 안보 보장 제시됐지만, 1994년 '종이 호랑이' 전철 밟을까 우려 확산
이미지 확대보기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특사인 스티브 위트코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논의하는 가운데, 안보 보장 실효성을 두고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 3위 핵보유국에서 비핵화로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약 1900개의 전략 핵탄두와 수천 개의 전술핵무기, 176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게 됐다고 워싱턴 소재 핵위협감소기구(NTI)가 밝혔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하루아침에 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핵보유국이 됐다.
하버드 케네디스쿨 벨퍼센터의 마리아나 부드제린 연구원은 "1990년 우크라이나 의회가 주권 선언을 채택할 때 핵무기 포기 원칙이 자연스럽게 포함됐다"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라는 국가적 트라우마와 민주화 운동의 반핵 분위기 탓에 핵과 관련된 모든 것이 소련, 모스크바, 억압 체제와 연결됐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는 핵탄두에 작동 통제권이 없었지만, 산업 역량을 고려하면 자체 핵무기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제임스마틴 비확산연구센터의 스티븐 헤르초그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핵무기 보유를 주장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부드제린 연구원은 전했다.
'보장'이 아닌 '확약'으로 후퇴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대가로 안보 보장과 핵물질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새로운 안보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유엔 헌장이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이미 명시된 약속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확약만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고 WP는 전했다.
1994년 12월 5일 우크라이나·러시아·미국·영국이 서명한 부다페스트 각서는 "서명국들이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 독립에 대한 무력 위협이나 사용을 삼가겠다는 의무를 재확인한다"고 명시했다.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도 소련 핵무기를 물려받았고 같은 약속을 받았다.
당시 미 국무부 관리였던 스티븐 파이퍼는 "1994년 1월 모스크바로 날아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번역본이 영어 원문과 같은지 확인해야 했다"며 "녹음 기록을 통해 러시아어 '가란티야'와 우크라이나어 '하란티야'가 영어 'assurance'(확약)의 의미로 이해되며 'guarantee'(보장)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회고했다.
부드제린 연구원은 "최종 부다페스트 각서 텍스트에 번역상 약간의 속임수가 있었다"며 "영어 공식 문서에는 안보 '확약'(assurance)이었지만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번역본에는 미국 정치 용어로 더 구속력 있는 의미인 안보 '보장'(guarantee)으로 표기됐다"고 설명했다.
2014년·2022년 러시아의 배신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병합하면서 부다페스트 각서 약속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 2022년 시작된 전면 침공은 더욱 대담한 위반이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유럽이사회에서 "핵무기를 포기한 나라는 우크라이나뿐이었고, 오늘 싸우고 있는 나라도 우크라이나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부다페스트 각서 서명 3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 외교부는 "진정하고 효과적인 안보 보장이 없었던 것은 전략 안보 의사결정에서 근시안을 보여주는 기념비"라며 "모스크바가 악용한 전략 실수였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임스마틴 비확산연구센터의 헤르초그 교수는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서방 파트너들의 이행은 매우 최소한의 해석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부드제린 연구원도 "우크라이나 역시 이 문서를 더 견고한 안보 체계로 발전시키는 데 거의 노력하지 않았다"며 "서명하고 선반에 올려두고는 잊어버렸다"고 지적했다.
나토식 보장 포함됐지만 의구심 여전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제시한 평화안에는 나토 제5조와 유사한 안보 보장이 포함됐다. 악시오스는 지난달 20일 입수한 초안에 따르면 "러시아의 중대하고 의도적이며 지속된 무력 공격이 발생할 경우 이를 대서양 공동체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군사력을 포함해 대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평화안은 우크라이나가 동부 영토를 포기하고 나토 가입을 포기하며 군 병력을 60만 명으로 제한하는 등 고통스러운 양보를 요구한다. CBS뉴스에 따르면 미국 관리는 지난달 말 "우크라이나가 평화안에 합의했으며 세부 사항만 정리하면 된다"고 밝혔다.
부드제린 연구원은 "국제 기준으로 보면 우크라이나는 모든 것을 제대로 한 나라"라며 "핵무기를 가질 수 있었지만 '선한 국제 시민'이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20년이 지나자 옳은 일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반도 안보 딜레마와 핵 억지력 논쟁
우크라이나 사례는 한반도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북한은 현재 약 5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해마다 핵물질 생산을 늘리고 있다고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최근 보고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1월 "핵무기는 체제 안보의 보증"이라며 핵 포기 의사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미국 평화연구소(USIP)는 지난 2월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경험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안보 보장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핵 비확산 체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에서도 여론조사에서 다수가 자체 핵무장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프랑스 전략연구재단(FRS)은 "한국이 핵무장할 경우 국제 제재와 고립 비용을 치러야 하며, 북한과의 긴장 고조로 오히려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가 1996년 모든 핵탄두를 러시아로 이전하고 전략 기지를 민간 용도로 전환하면서 완전히 의무를 이행했지만, 보장국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안보 보장 약속의 실효성 논란은 핵 비확산 체제 전체의 신뢰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