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삼성 2026년 생산 라인 이미 '완판'…오픈AI '스타게이트' 등 빅테크가 싹쓸이
"스마트폰·PC 만들 칩 씨가 말랐다"…가전업계, 부품값 폭등에 '가격 도미노 인상' 공포
"스마트폰·PC 만들 칩 씨가 말랐다"…가전업계, 부품값 폭등에 '가격 도미노 인상' 공포
이미지 확대보기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본사. 지난 10월부터 이곳 로비는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글로벌 PC 제조사와 스마트폰 업체 구매 담당자들이 진을 치고 '물량 사수' 작전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찾는 것은 당장의 물량이 아니다. 1년 뒤인 2026년에 사용할 메모리 반도체다.
AI(인공지능)라는 거대한 해일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지형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챗GPT로 촉발된 생성형 AI 열풍이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첨단 서버용 반도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정작 우리 일상에 필수적인 스마트폰과 가전용 범용 메모리 시장에 '수급 절벽(Supply Cliff)'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최태원 회장의 고심…"오픈AI까지 줄 섰다"
"전 세계 테크 기업들이 메모리 좀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이 엄청난 수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솔직히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1월 초 서울의 한 포럼에서 털어놓은 이 한마디는 현재 메모리 시장이 철저한 '공급자 우위(Seller's Market)'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최 회장은 특히 챗GPT의 아버지, 오픈AI(OpenAI)조차 공급을 애원하는 수많은 고객사 중 하나라고 밝혔다.
실제로 본지 취재와 닛케이아시아 보도를 종합하면, SK하이닉스는 지난 10월 오픈AI의 초대형 AI 인프라 프로젝트 '스타게이트(Stargate)'를 위해 월 웨이퍼 90만 장 분량의 HBM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파악된다. 단일 기업이, 그것도 단일 프로젝트를 위해 전 세계 생산 능력의 상당 부분을 선점해버린 것이다. 이는 AI 빅테크들이 메모리 시장의 '큰손'을 넘어 '포식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삼성전자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는 3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업계의 모든 역량이 AI 서버용 고수익 제품에 집중되고 있다"며 "이로 인한 풍선효과로 모바일과 PC 등 레거시(Legacy) 제품군의 공급 부족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공식 인정했다.
복수의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빅3'의 공장은 이미 100% 풀 가동 중이다. 충격적인 사실은 2026년 할당된 생산 슬롯(Slot·생산 능력)마저 이미 주인이 다 정해졌다는 점이다. 지금 주문서를 들고 가봤자 2027년 이후에나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AI가 촉발한 '슈퍼 사이클', 투자는 늘지만 파이는 한정
AI 데이터센터는 '반도체 먹는 하마'다.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가 두뇌라면, 메모리는 그 두뇌에 끊임없이 데이터를 퍼 나르는 혈관이다. 혈관이 넓고 빨라야 AI가 제 성능을 낸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진단했다. 모건스탠리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들의 AI 데이터센터 서버 투자액은 2024년 2850억 달러(약 410조원)에서 2026년 6210억 달러(약 910조 원)로 폭증할 전망이다. 불과 2년 만에 시장 규모가 2.2배 커지는, 반도체 역사상 유례없는 '퀀텀 점프'다.
한 부품 업계 임원은 "올 들어 엔비디아발 주문은 2배, AMD발 주문은 1.5배 늘었다"며 "라인을 증설하고 있지만, 쏟아지는 주문을 소화하기엔 역부족"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D램 시장의 판도는 HBM이 주도하고 있다. 삼성, SK, 마이크론에 이어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 대만의 난야 등 후발 주자들까지 뛰어들었지만, AI용 초고성능 제품의 수율을 맞추는 건 여전히 난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불균형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낸드플래시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AI 학습뿐 아니라 추론(서비스) 단계에서도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호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낸드 강자 키옥시아(Kioxia)는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으로 전례 없는 호황이 올 것"이라며 다음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예고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의 클레어 웬 애널리스트는 "낸드플래시 평균판매단가(ASP)가 올해 4분기에만 20% 가까이 뛰고, 내년 상반기에도 15% 안팎의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바야흐로 '부르는 게 값'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메모리 보릿고개' 직면한 가전업계…소비자가 '가격 폭탄' 맞는다
지난 2년간 '혹한기'를 견뎌낸 메모리 기업들에게 현재의 상황은 '즐거운 비명'이다. 마이크론 주가는 6개월 새 150% 폭등했고, 삼성전자 주가도 70% 넘게 뛰었다.
하지만 이 축포의 그늘에는 가전·스마트폰 제조사들의 비명이 서려 있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다. 쌀값이 폭등하면 밥값이 오르듯, 메모리 가격 급등은 필연적으로 완제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다.
중국 파운드리 업체 SMIC(中芯国际)의 자오하이쥔(赵海军)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이를 두고 "생존의 문제"라고 경고했다. 그는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CPU를 구해도 메모리가 없어 제품을 못 만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일부 중저가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이미 부품 수급난으로 생산 계획을 축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의 엘리 왕 애널리스트는 "가장 큰 공포는 '가격 전가(Cost Pass-through)'"라고 지적했다. 부품 원가 상승분을 제조사가 감내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TV, 냉장고, 스마트폰 가격표가 바뀔 것"이라며 "이는 고물가에 지친 소비 심리를 더욱 얼어붙게 만들어, IT 시장 전체의 침체를 부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AI 혁명이라는 화려한 파티 뒤편에서, 2026년 글로벌 IT 시장은 '공급 대란'과 '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청구서를 받아 들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이천과 평택의 반도체 공장에서 벌어지는 총성 없는 전쟁은, 머지않아 우리의 지갑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