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디·폭스바겐, 현지 기술 도입해 신차 개발 속도전
연구개발 비용 절감 이면의 '브랜드 정체성' 상실 딜레마
연구개발 비용 절감 이면의 '브랜드 정체성' 상실 딜레마

세계 자동차 산업의 기술 지형도가 뒤바뀌고 있다. 아우디·폭스바겐 등 전통의 강자들이 중국 전기차(EV)의 플랫폼과 소프트웨어를 이식받아 신차 개발 속도전에 뛰어들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14일(현지시각) 진단했다. 이러한 전략은 단기적으로 연구개발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판도 변화의 시작은 2021년, 아우디 경영진이 중국 지리자동차그룹의 고급 브랜드 '지커'가 내놓은 '001' 모델을 마주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의 세련된 미학과 압도적인 주행거리를 갖춘 지커 001의 등장은 독일 고급차 브랜드에 거대한 충격파를 던졌다.
상하이자동차 아우디의 슈테판 포츨 영업·마케팅 총괄은 당시를 회상하며 "지커 001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며 "우리는 뭔가 조치를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위기감을 느낀 아우디의 선택은 파격적이었다. 아우디는 SAIC와 공동 개발한 ADP(Advanced Digitized Platform)를 바탕으로 'E5 스포츠백'을 포함한 EV 3종을 기획해 2025년 중국 시장에 내놓는다. 부품·배터리·인포테인먼트·운전자 보조 시스템 등 핵심 기술을 SAIC에서 제공받아, 기존 독일 생산 모델보다 출시 시간을 30% 이상 단축했다. 아우디는 외관·실내 디자인과 고급 설계에 집중하고, SAIC가 소프트웨어·구동계(전기모터, 배터리관리 등)·연결성·하드웨어 개발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나눴다. 아우디는 약 3만 3000달러(약 4590만 원) 가격표를 붙인 이 모델의 고객 인도를 이달부터 시작한다.
아우디의 이런 행보는 거대한 흐름의 서막에 불과했다. 폭스바겐은 중국 샤오펑(Xpeng)과 손잡고 '차이나 온리(China Only)' EV 모델을 공동 개발하며, 앞으로 세계 시장 출시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토요타 역시 GAC와 손잡고 중국 전용 모델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르노와 포드는 중국 EV 기업의 플랫폼을 세계 신모델 개발에 직접 도입하거나 사용권 계약 방식으로 활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르노는 중국 둥펑의 플랫폼으로 유럽 소형 EV(다치아 스프링)를 생산했으며, 포드는 CATL의 배터리 기술을 북미 생산 라인에 적용했다.
'기술 쇼핑' 나선 거인들, '차이나 인사이드' 택했다
이러한 기술 사용권 계약은 중국 EV 제조사에게 새로운 수익 창출원이 된다. 자국 내 출혈 경쟁과 심화하는 무역 갈등 속에서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세계 제조사들은 개발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고 신차를 빠르게 출시할 수 있는 '지름길'을 얻는다.
오토데이터스의 윌 왕 제너럴 매니저는 "양측 모두에 이익이 되는 매우 현명한 상생 해법"이라고 평가했다.
이 새로운 전략은 1990년대 PC 시장을 휩쓴 '인텔 인사이드' 캠페인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인텔이 최첨단 부품 공급을 통해 PC를 고급 제품으로 격상시켰듯, 이제는 중국 기업들이 '상자 속 EV 기술'을 판매한다. 이들은 '화이트 라벨' 형태로 완성 플랫폼, 배터리 기술,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묶어 판매하며, 소규모 예산으로 소량 생산을 원하는 업체에도 매력적인 선택지를 준다.
대표적인 사례는 립모터-스텔란티스(외부 브랜드용 플랫폼 수출), CATL-포드(배터리 기술 사용권 계약), 그리고 중국 기술로 영국 명차의 EV 전환을 꾀하는 CYVN-니오-맥라렌 파트너십 등이다. 자동차 업계 전문가들은 기성품처럼 만들어진 중국산 EV 섀시와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면, 전통 강자들이 수십억 달러의 비용과 수년의 개발 시간을 절약하며 단숨에 중국 경쟁자들과의 격차를 좁힐 수 있다고 분석한다. 중국 EV 플랫폼은 개방성과 모듈화, 현지 최적화 소프트웨어 덕분에 다양한 디자인과 차종 개발이 쉽다. 이들은 테슬라 방식의 빠른 개발과 모듈 설계를 본보기 삼아, 세계 제조사의 '신속한 업데이트'·'품질 보증'·'원가 절감'에 직접 도움을 준다.
속도 얻고 영혼 잃나…'정체성 상실'의 딜레마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길게 봐도 상생 모델로 남을지는 미지수다. 가장 큰 위험은 세계 브랜드가 기술에 종속돼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올리버 와이먼의 마르코 산티노 분석가는 "중국 EV의 경쟁력은 세계 완성차 업체가 개발 곡선을 단번에 뛰어넘게 하는 '화력'이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앤디 파머 전 애스턴 마틴 CEO는 "연구개발 비용을 아낄 수는 있겠지만, 제3자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면 장기적으로는 단순한 유통업체로 전락해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르코 산티노 분석가 역시 "다른 회사의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브랜드 차별화 역량이 극도로 제한된다는 뜻"이라며 "자체 기술과 중국 플랫폼을 조합해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속도를 얻는 대가로 영혼을 잃을 수 있다는 딜레마가 세계 자동차 거인들 앞에 놓여있는 셈이다. 중국 EV 기술은 플랫폼, 배터리, 소프트웨어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자동차 디자인과 생산 구조를 재편하며, 전통 브랜드의 기술 독립성과 차별화 경쟁력에 새로운 도전과제를 던지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