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스트 게임"처럼 속여 군사기지 촬영·폭탄 설치까지...미성년자 4명 중 1명 기소
메신저로 접근해 돈 미끼·게임 임무로 청소년 유인, 방화·테러·정보 유출로 전쟁 무기화 시도
메신저로 접근해 돈 미끼·게임 임무로 청소년 유인, 방화·테러·정보 유출로 전쟁 무기화 시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정보기관이 소셜미디어와 메신저 앱을 활용해 마치 게임을 하듯이 미성년자를 스파이와 테러리스트로 끌어들이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보안국(SBU)과 경찰은 최근 전국 고등학교에 찾아가 러시아 정보요원의 접근을 조심하라고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 메신저로 돈 미끼, "퀘스트 게임"에 속아 정보 넘긴 청소년들
지난해 봄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텔레그램, 디스코드 등 메신저 앱을 통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들이 청소년을 조직적으로 포섭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SBU에 따르면, 요원들은 "퀘스트 게임"이나 "빠른 현금"을 미끼로 청소년에게 접근해 군사시설 촬영, 폭탄 설치, 방화 등 위험한 임무를 지시한다.
실제로 지난해 봄부터 SBU가 간첩, 방화, 폭탄 음모에 연루된 700명 이상을 체포했는데, 이 중 175명(약 25%)이 18세 미만이었다고 SBU 대변인 아르템 데크티아렌코가 FT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최근 체포된 16세 소년은 텔레그램으로 FSB 요원과 연락해 군대 위치를 촬영하고 위치 데이터를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남부 드니프로시 군사기지 근처에서 현장 검거됐다.
SBU 관계자는 "이 청소년이 모은 정보가 최근 몇 달간 우크라이나 도시와 주요 기반시설을 공격한 러시아 미사일이나 드론 공격에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러시아 탄도미사일이 드니프로의 목표물을 공격해 20명이 숨지고 170명 이상이 다친 사례가 있다.
청소년들은 처음엔 단순한 물건 전달이나 발전소 촬영 등 쉬운 임무로 시작하지만, 나중엔 협박에 휘말려 더 위험한 임무로 들어간다. 보상금은 100~1,000달러(약 13만~135만 원)로 제시된다. 일부 청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자살폭탄 테러범이 돼 숨지거나 다치는 사례도 나온다. 지난 3월 15세와 17세 청소년 두 명은 텔레그램에서 1,700달러(약 230만 원)를 약속받고 보온병과 금속 나사 등으로 사제 폭탄을 만들다가, 기차역 인근에서 폭탄이 일찍 터져 한 명은 숨지고 한 명은 다리를 잃었다.
◇ "퀘스트 게임"에 속아 정보 넘긴 10대, 공습 유도
러시아 정보기관은 "퀘스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청소년을 유인한다. 퀘스트 게임은 본래 온라인 게임에서 주인공이 임무를 받아 수행하고 보상을 얻는 방식의 콘텐츠를 뜻한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전쟁에서 청소년에게 "퀘스트 게임"에 참여한다고 속여, 특정 장소의 사진을 찍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등 임무를 지시하고 보상금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게임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군사시설 촬영, 폭탄 설치 등 위험한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하르키우에서 체포된 15세와 16세 청소년은 자신이 게임에 참여한다고 믿고 FSB 요원에게서 지리적 위치를 받아 특정 장소의 사진과 영상을 찍어 텔레그램으로 정보를 보냈다. SBU는 "러시아군이 이 정보를 활용해 하르키우에 공습을 가했다"고 밝혔다. 지난 12월에도 온라인에서 모집된 '퀘스트 게임'에 속아 정보를 염탐한 10대가 있었다.
지난달 25일 SBU와 경찰은 하르키우에서 러시아 요원의 지시에 따라 폭탄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19세 여성을 붙잡았다. 이 여성은 텔레그램 채용 공고 채널을 통해 접근받았고, 급조 폭발장치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후 군대에 기증된 전기 스쿠터에 폭탄을 심어 폭발로 군인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이 다쳤다.
◇ 전국적 예방교육과 인식 캠페인 확대
우크라이나 당국은 미성년자 포섭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전국적으로 경고문구와 동영상 등 인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고속도로 광고판, 여객열차, 대량 문자 메시지 등 다양한 채널로 경고가 전달된다. SBU 요원들은 학교에 직접 찾아가 학생들에게 러시아 정보기관의 접근을 조심하라고 교육한다. 캠페인 슬로건은 "자신을 불태우지 말고, 적을 불태워라!"다.
르비우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군복 차림의 정보관이 강사로 나서 "우크라이나에서는 14세부터 형사처벌 대상"이라며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처벌이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5월 말 기준 미성년자가 포섭 시도를 신고한 건수는 50건에 이른다.
◇ 법적 조치와 인권 논란
우크라이나는 계엄령 아래서 사보타주, 테러리즘, 협력 및 대역죄로 기소된 자에게 종신형을 포함한 장기형을 선고할 수 있다. SBU 국장 바실 말류크는 "적들은 공격적이고, 우리 국민 가운데서 요원을 모집하는 등 국가 안보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밝혔다. 반역죄로 기소된 미성년자는 법적 대리인을 둘 수 있지만, 아직 재판에 넘겨진 사례는 없고 일부는 올해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다.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우크라이나 선임 연구원 율리아 고르부노바는 "아동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의심이 있을 때, 당국은 재활과 사회 복귀를 우선으로 하면서 국제 소년 사법 기준에 따라 아동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아동을 구금하거나 구류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해야 하고, 미성년자 신분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법적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정보기관의 미성년자 포섭은 전쟁터를 넘어 내부 불안정화 전략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청소년을 자신의 전쟁 무기로 바꾸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편 미성년자에 대한 법적 조치와 인권 보호 문제도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SBU는 "적법한 절차가 준수되고 있고, 청소년 용의자에 대해 특별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미성년자 협력자 증가에 대한 단호한 대응 압박도 존재한다. SBU 국장 말류크는 "우리에게 그들은 국가 반역자"라고 밝혔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