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긴 여정의 첫 걸음' 내...고생한 아내에게 마음의 선물
지난 직장생활 모두 영광과 기쁨... 첫 직장 잘 골라야 인생 성공
지난 직장생활 모두 영광과 기쁨... 첫 직장 잘 골라야 인생 성공
이미지 확대보기그 흰 고무신은 나주에서 광주, 광주에서 서울로 걸음을 옮기며 이제 다 닳아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그 걸음의 기억을 이동호는 자전적 에세이 '긴 여정의 첫 걸음'에 담았다. 저자 이동호는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허리 무릎 팔목 등 70여년 쓰고나니 그 매끈하던 관절의 아교질이 너덜너덜하다. 그러니 글쓰기는 그에게 노동이었지만 그 노동은 인생 말년 마음의 삽이 됐고 창작의 신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를 망원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젊어서는 못 말리는 애주가...요즘 성경공부 열심
-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은퇴하고 2년 정도 빈둥빈둥하면서 해방감을 즐겼죠. 그러다 '세월 낭비하는 게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버킷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요즘 하나둘 그걸 실천하고 있습니다"
책 '긴 여정의 첫 걸음'에도 나오지만 그는 젊은 시절 못말리는 애주가였다. '덕분'에 몸이 성한 데 없어 걷기와 스트레칭을 꾸준히 한다고 했다. 친구들과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꾸준히 성경을 가까이 하며 믿음을 굳건히 세우려 노력하고 있다.
- 책 쓰려고 마음 먹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요.
"뭔가 써보자는 게 버킷 리스트에 있었어요. 별거 아니지만 내 지난 얘기를 정리하면서 아내에게 선물도 할까 해서 쓰기를 시작했죠. 회사 다니면서 맨날 보고서나 써봤지 글다운 글이라는 걸 써본 적이 없어 힘들었습니다. 주변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출판사 권유로 엉겁결에 시중에 나왔습니다"
책을 쓰기 1년여 전, 가승보를 만들었다. 일반 족보와 달리 직계 선조 중심의 기록물로 조부모 부모 등의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담는 것이다. 이를 1년 동안 만들어 인쇄해 일가친척에게 돌렸다. 그게 호평을 얻었고 글쓰기에 힘을 주었다고 한다.
"직장은 자기 꿈 실현하는 인생 그 자체"
- 책 제목이 '긴 여정의 첫 걸음'인데, 뭔가 있어 보입니다.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처음 쓴 수필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흰 고무신을 갖고 싶어 할머니를 따라 나주 집에서 영산포장까지 왕복 60리 길을 걸었던 추억을 담은 건대, 돌이켜보면 어릴 적 힘들었던 걸음이 어쩌면 제 인생의 첫 걸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목으로 정했죠"
- 책에는 여러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특별한 걸 꼽자면.
"'어머니의 선거'라는 수필인데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님이 출마했던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얼마 뒤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누구를 찍었냐가 화제가 되면서 각자 누구를 찍었다 한마디씩 하는 얘기입니다. 그때 대부분 (지역 연고에 따라) 2번(김대중)을 찍었다고 했고 어머님도 당연히 그러려니 했는데 어머님은 3번(정주영)을 찍었다고 했어요. 순간 가족 모두 말을 잃었어요. 아들이 (정 회장의) 회사 다니는데 당연히 3번 아니냐는 말에 모두 말이 없었죠"
이 실화는 두고두고 여러 자리에서 얘기가 됐고 그때마다 자리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정치 신념을 뛰어넘는 모정이 가슴을 울린다.
- 회사 시절 얘기 해볼까요? 돌아보면 기쁨의 순간, 좌절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브랑코 밀라노비치 교수 말을 빌어와 '직장과 나'라는 수필을 썼습니다. 여기까지 온 건 순전히 운입니다. 직장생활 하다보면 아픔도 많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영광이고 기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 확대보기'직장과 나' 수필에서 이동호는 직장은 노동력과 기술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보상을 받는 곳이라면서도 자신은 그저 돈을 버는 장소가 아니라 역량을 발휘하고 경쟁을 하는 가운데 꿈을 실현해 나가는 인생 그 자체라고 했다. 그러면서 브랑코 밀라노비치 교수 글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부유하게 살지 가난하게 살지는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가 50~60%,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느냐가 20~30%이고 개인 능력이나 노력이 20% 정도라는 것. 이동호는 그 20% 중 8할은 직장이 어디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어느 직장에 몸담고 있느냐에 따라 인생 방향이 달라진다는 설명이다.
- 직장 트렌드도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조언 하신다면.
"제가 무슨 자격이 있나요. 굳이 말씀 드린다면, 저희 때와 지금 세대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저희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으로 야근이나 휴일 근무도 마다 하지 않고 성실 근면 구호 아래 정말 열심히 일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세대는 워라밸이라고 일 못지 않게 여가를 중시하더군요.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이어지는 말에서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제 아들에겐, 요즘 스펙이나 능력은 비슷하니 상사에게 인정 받으려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라고 말합니다. 시대에 많이 뒤떨어졌죠?"
'라면 국물에 찬밥 한 덩이'는 보람 찾자는 작은 다짐
- '라면은 끝나지 않았다. 국물에 찬밥 한 덩이 말아먹는 마무리가 남았다'고 썼습니다. 어떤 뜻인가요?
"정신 없이 살다보니 어느덧 70이 넘었어요. 앞으로 두 발로 건강하게 걸으며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보람있고 의미있게 살아보자는 '저 혼자만의 작은 다짐' 같은 겁니다"
작은 라면 냄비 하나에 담긴 '작은 다짐'이라지만 건더기(면)는 국물이 없이는 제 맛을 자랑할 수 없고 국물은 건더기 없이 어찌 그 효용이 있겠는가. 거기에 스프는 라면을 라면답게 국물을 국물답게 하니 빠질 수 없는 필수템. 이 세가지가 삼위일체로 '라면'이 비로소 완성된다라는 게 라면 철학. (이동호는 해장라면 수천 그릇은 족히 먹었다 했다) 남은 국물에 찬밥 한 덩이는 인생의 남은 역량을 쏟아붓는 처절한 총력전 아닐까.
- 앞으로 글을 더 쓰실 건가요?
"막상 써보니 정말 어렵습니다. 수필처럼 긴 글은 자신 없고 짧은 시 같은 건 틈틈이 써보겠습니다"
저자 이동호는 몇번이고 건강을 강조했다. 책에서도 그랬다. 내 삶의 겨울을 위해 '마음 비우기'라는 김장을 담그고, '건강'이라는 땔감을 차곡차곡 쌓아두어야겠다고.
엄정권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astoday@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