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마음산책(315)] 거절당한 자들의 '역전승'

회의장 안팎에서 혹은 집이나 훈련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노심초사 기다렸을 그들. 마지막 110번째 선수가 불릴 때까지 초조하게 귀를 기울였을 그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절망하며 야구 인생의 끝을 떠올렸을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10년 이상 오직 야구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 단 하루만에 무너지는 듯한 감각. 그것은 단순한 탈락의 아픔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 자체가 거부당한 것 같은 절망이다. "나는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을까?" 매일 아침 훈련장에 나가며 자신에게 했던 질문의 답이 '아니요'로 돌아온 순간. 부모님의 헌신, 감독님의 가르침, 동료들과의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헛되었다는 자책감이 밀려온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라고 부른다. "나는 야구 선수다"라는 자기 정의가 흔들리는 순간 청년들은 존재론적 공허를 경험한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의 발달단계 이론에 따르면 청년기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 시기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자신이 평생 준비해온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도 들려준다. 드래프트에서 선발되지 않은 것이 야구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때로는 더 위대한 스토리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증거는 지금도 그라운드 위에서 뛰고 있다.
드래프트 탈락이 자동적으로 야구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육성선수 입단을 통한 프로 진출의 기회는 여전히 열려 있다. 물론 정식 선수로 올라서고 1군에서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은 더욱 험난하다. 하지만 험난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성선수 출신 중에도 KBO리그에서 스타로 도약한 선수는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장종훈 선수와 김현수 선수를 꼽을 수 있다. 한화의 영구결번 선수인 장종훈(현 우석대 코치)은 '육성선수'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시절 KBO리그에서 최초로 '연습생 신화'를 만들어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세광고 졸업 후 고등학교 시절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고, 특히 신체조건이 프로 구단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드래프트에 실패했다. 그 후 테스트를 받고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그는 1987년 1군에 데뷔했고, 1988년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리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연속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현역선수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육성선수 출신으로는 '타격기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김현수(LG)가 있다. 고교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받을 정도로 타격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지만, 외야수로서는 발이 느리고 근성이 없다는 스카우트들의 평가로 200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두산 베어스에 육성선수로 입단한 김현수는 2008년 타격왕에 오르며 3년 만에 스타로 도약했고, 2016년에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리고 LG와 두 번의 FA 계약을 통해 200억 원이 넘는 거액을 번 '야구 재벌'이 됐다.
이외에도 육성선수 출신으로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들은 많다. KBO리그 최초로 4연타석 홈런을 친,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박경완(현 LG 코치)이 있고,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선수로는 김현수 외에도 채은성(한화), 최재훈(한화), 박해민(LG) 등이 활발히 그라운드를 누비며 모범적인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드래프트 제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18세 혹은 22세 청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스카우트들은 현재의 구속, 타율, 수비력을 본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거절당한 이후의 투지,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정신력 그리고 증명하려는 간절함이다.
심리학자 캐럴 드웩(Carol Dweck)은 '마인드셋(Mindset)' 이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태도와 사고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연구했고, '고정 마인드셋(fixed mindset)'과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을 구분했다. 고정 마인드셋은 능력과 재능이 타고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인 반면, 성장 마인드셋은 노력과 학습을 통해 능력도 계발될 수 있다고 믿는 긍정적인 태도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보고 더 노력한다. 이 이론은 교육, 스포츠, 비즈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인의 발전과 동기부여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는 이 마인드셋이 선수가 역경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리적 기초로 인식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인생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에도 '세컨드 찬스 효과(Second Chance Effect)'라는 개념이 있다. 개인이나 기업이 첫 시도에서 실패했을 때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경우 발생하는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뜻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폴 고메즈-메지아(Paul Gomez-Mejia)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첫 번째 사업에서 실패한 후 재기한 기업가들이 오히려 더 높은 성공률을 보인다. 그들은 실패를 통해 배웠고, 더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드래프트에서 탈락한 선수들은 자신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한다.
육성선수 제도는 이러한 시스템의 한계를 보완하는 안전망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제도적 장치를 넘어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보여 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의 평가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잠재력은 개인의 의지와 환경의 지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프로야구 드래프트는 야구계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주는 교훈은 보편적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수없이 많은 '드래프트'를 경험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는 인생의 첫 번째 드래프트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입시는 여전히 사회적 성공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능을 치르는 약 50만 명의 학생 중 자신이 원하는 명문대학교에 합격하는 학생은 극소수다. 그나마 자기가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는 학생은 더욱 극소수다. 나머지 대부분은 '원하는 대학'과 '원하는 학과'에 가지 못한다. 입시 결과에 따라 수많은 학생들이 좌절한다. 하지만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취업은 두 번째 드래프트다. 2024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 실업률은 5.8%지만 체감 실업률은 훨씬 높다. 대기업 공채에 수천, 수만 명이 지원하지만 합격하는 이는 수십 명에 불과하다. 수백 번의 서류 탈락과 면접 탈락을 경험한 청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의심한다. 그리고 좌절하고 포기한다.
하지만 장종훈과 김현수의 커리어가 보여주듯, 한 번의 거절이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2006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한 청년이 2008년 타격왕이 되고, 2016년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고, 202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기까지 17년이 걸렸다. 그 17년은 단순히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매일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현대 사회는 '빠른 성공'을 강조한다. 20대에 억대 연봉, 30대에 임원, 스타트업의 신화적 성공.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성공 스토리로 넘쳐 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천천히, 때로는 우회하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진행된다. 육성선수들의 커리어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느린 성공의 가치'다.
육성선수 제도는 이러한 평가 시스템의 한계를 인정하고,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하는 장치다. '패자부활전', 즉 '세컨드 찬스'다. 현대 조직들도 이러한 패자 부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첫 평가에서 탈락했다고 해서 영원히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는 것이 결국 조직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
현재 심리학에서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회복탄력성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정신'이다. 현대인은 끊임없는 위기와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시대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힘, 거절당했을 때 다시 도전하는 용기,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는 의지다.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언제든지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패자부활전'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거절당한 자들의 역전승. 그것은 단순히 스포츠의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서 가능한 이야기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