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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카드 잠재부실] 兆단위 빌려도 장부엔 '무차입'… 회계 사각지대

구매카드 이용 잔액, 작년 말 기준 최소 6조 원 급성장
만기 수개월 불과, 상환·재조달 실패 시 현금 유출 부담
회계상 ‘매입채무·미지급금’ 분류…위험 적은 착시 유발
산업계에서 이용이 늘고 있는 ‘구매전용카드’(구매카드)의 잠재부실을 우려하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 이미지=픽사베이이미지 확대보기
산업계에서 이용이 늘고 있는 ‘구매전용카드’(구매카드)의 잠재부실을 우려하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최근 산업계에 확산되는 ‘구매전용카드’(구매카드)의 잠재부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구매카드는 장부상으로는 대출이 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달 뒤 반드시 현금으로 갚아야 할 외상이다.
만기가 대개 수개월에 불과해 상환이나 재조달(차환)을 계속 이어가야 하고, 자금시장이 흔들리면 새로 돌릴 자금이 막혀 결제 자금을 한 번에 막아야 한다. 기업의 유동성 부담이 커질 경우 이를 제공한 카드사, 해당 전자단기사채(전단채)에 투자한 투자자까지 빠르게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9일 나이스신용평가 분석과 여신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시장에서 일부 산업군을 중심으로 구매카드 이용 규모가 커지면서 잠재부실을 우려하는 시각이 제기된다. 산업계 구매카드 이용 잔액은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지난해 말 기준 최소 6조 원, 최대 10조 원 규모로 매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구매카드의 구조는 카드사·금융기관이 납품업체에 먼저 대금을 지급하고, 기업이 몇 달 뒤 상환하는 ‘공급자금융’(역팩토링) 방식이다. 납품업체에 먼저 돈이 나가면 그 받을 돈(외상 대금)을 한데 모아 별도 법인(SPC·유동화를 전담하는 회사)에 넘긴다.
SPC는 이를 담보로 ‘단기채(전단채)’를 발행해 당장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주고, 몇 달 뒤 기업이 SPC에 갚으면 그 돈으로 단기채를 상환한다. 평소에는 이 고리가 매끈하게 돌아가지만, 단기채가 안 팔리거나 금리가 급등하면 차환이 막혀 기업이 현금을 급히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문제는 회계상 처리 방식, 즉 장부에 기록할 때 착시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구매카드로 생긴 의무는 회계상 차입금이 아니라 매입채무·미지급금·기타지급채무(기타금융부채)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총부채엔 들어가지만 시장과 채권약정이 주로 보는 총·순차입금 같은 이자부채 지표에는 반영이 약해 위험이 낮아 보이는 착시가 생긴다. 쉽게 말하면 사실상 차입이나 마찬가지지만 무차입처럼 보이게 되는 셈이다.

현금흐름 측면의 왜곡도 작지 않다. 유동화증권 만기가 통상 6개월 안팎이라 기업은 그만큼 납부를 뒤로 미루며 운전자금을 ‘확보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기 유동성에 기대는 효과일 뿐이고 차환이 흔들리면 미뤄놓았던 외상 대금이 한 번에 돌아오며 영업현금흐름이 급역전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조달금리 상승, 프로그램 한도 축소, 담보·보완약정 요구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 유동성 방어선이 빠르게 무너지는 구조다.

올해 불거진 ‘홈플러스 사태’가 대표적이다. 홈플러스는 납품대금을 구매카드로 외상 처리했고, 그 외상값은 전단채를 계속 새로 발행해 갚을 시점을 미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전단채가 더 이상 팔리지 않자(차환이 막히자) 외상값을 현금으로 당장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됐고, 그 고리가 끊기며 문제가 터졌다. 이 여파로 전단채 투자자들의 손실 우려가 커졌고, 외상 자금을 댄 롯데카드도 수백억 원대 손실 위기에 놓였다.
금융당국도 구매카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회계기준(K-IFRS)은 이미 공급자금융약정 관련 공시를 보강했다. 기업은 약정 규모와 표시 항목, 약정 외 매입채무와의 지급기일 비교 등 핵심 정보를 주석에서 상세히 드러내야 한다. 전문가들은 구매카드 관련 잠재부실 위험이 커지는 만큼 얼마를 언제 갚을지(잔액·만기)를 분명히 알리고, 돈줄이 막혀도 버틸 비상자금 계획을 미리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보고서를 작성한 나이스신용평가의 김가영 평가정책본부 평가기준실장은 “구매카드는 회계상 ‘차입금’이 아닌 매입채무·기타금융부채로 잡혀 총·순차입금 지표를 왜곡할 수 있다”면서 “차환에 차질이 생기면 영업현금흐름이 급격히 나빠질 수 있는 만큼 약정 규모·만기·지급기일 구조 등 현금 유출 요인을 상시 점검하고, 시장과 투자자가 위험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충분히 공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석경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hong@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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