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무임소승차 끝났나… 상향 압박 속 쪼개지는 유럽의 재정
미국발 '5% 요구'는 협상 카드인가… 서유럽, 복지 삭감 속 긴축의 시험대
미국발 '5% 요구'는 협상 카드인가… 서유럽, 복지 삭감 속 긴축의 시험대
이미지 확대보기유럽이 냉전 이후 가장 혹독한 군비 확장 요구를 맞닥뜨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부에서 방위비 지출 기준을 기존 국내총생산(GDP) 대비 2%에서 3% 이상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최대 5% 수준까지 거론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강력한 안보 부담 분담을 요구하며 가져온 파장이다.
그러나 안보 위기감 속에 지갑을 열기 시작한 북유럽·동유럽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핵심국은 재정 적자와 국내 반대에 가로막혔다.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정상회의 막바지 단계에서 표면 협력 뒤에 숨은 유럽의 깊은 재정 분열이 수면 위로 번진다.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던 시대의 종말은 유럽 정부에 감당하기 어려운 재정 부담을 밀어 넣고 있다.
유럽의 문제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대한 정치 합의가 없다는 점이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6일(현지시각) 유럽 각국이 처한 재정 압박과 동맹 내부의 갈등을 집중 보도했다.
5% 압박의 실체와 협상 프레임… 순수 국방비 대 안보 확장 개념
미국이 요구하는 '5% 지출' 내막을 뜯어보면 순수 군사력 증강이라기보다 고도의 정치 협상 카드에 가깝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거는 고율의 국방비 청구서는 유럽을 압박해 동맹 내 협상 우위를 점하려는 포석이라는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방위비 개념 자체를 두고 동맹 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미국은 탱크와 미사일 구매 같은 핵심 군사 지출 확대를 요구한다. 반면 재정난에 처한 유럽 국가들은 사이버 방어, 우크라이나 우회 지원, 방산 허브 구축을 위한 산업보조금까지 방위비 실적에 포함해야 한다고 맞선다.
지출 합의를 맞추기 위한 일종의 '회계 착시'를 노리는 셈이다. 결국 트럼프의 압박은 유럽의 진정한 군비 증강을 이끌어내기보다 유럽이 미국산 무기를 더 많이 구매하도록 강제하는 무역 협상 도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결국 방위비 논쟁은 군사 문제가 아니라, 유럽이 미국에 지불하는 ‘안보 보험료’ 가격을 둘러싼 협상에 가깝다.
'거리 비례' 안보 인식과 서유럽의 깊어지는 재정 압박
유럽의 국방비 증액 속도는 러시아와 맞닿은 국경선 거리에 비례한다. 러시아의 군사 위협을 생존 문제로 인식하는 동유럽 국가들은 이미 상향된 군사 지출 기준선에 빠르게 다가서고 있다. 지난해 폴란드는 GDP 대비 4.3%를 국방비로 쏟아부으며 유럽 내 최고 수준의 투자율을 기록했다.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역시 강력한 국내 여론을 바탕으로 군사 지출을 늘린다. 독일은 오랜 재정 억제 원칙을 깨고 국방 지출을 오는 2030년까지 2000억 유로(약 344조 원) 이상으로 지난해보다 두 배 넘게 늘릴 방침이다.
반면 전장과 거리가 먼 서유럽 대국들의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고질적인 재정 적자가 발목을 잡는다. 영국 정부는 최근 150억 파운드 규모의 국방비 추가 증액 계획을 발표했으나 이 가운데 3분의 1은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안이 없다.
프랑스도 국방비를 GDP 대비 2.5%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했지만, 당장 눈앞의 재정 적자 감축과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라는 난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
이탈리아는 높은 국가부채 때문에 정규군 전력 증강 대신 국내 보안 지출을 국방비 실적에 끼워 맞추는 고육책을 쓰고 있다. 스페인은 아예 지출 규모를 2.1% 수준으로 제한하고 민간 유용이 가능한 기술 투자만 우선하겠다는 처지다. 경기 침체 속에서 보건, 교육, 연금 예산을 줄여 무기를 사겠다는 정책은 표심을 흔드는 시한폭탄과 같다.
재정 충격의 시장 경로… 남유럽 국채 스프레드와 방산 패권 경쟁
국방비 강제 증액이 초래할 경제 충격은 이미 금융시장의 세 가지 경로를 통해 가시화된다.
첫째 국채 시장이다. 국방비 재원 마련을 위한 유로존 국가들의 국채 발행 증가는 신용도가 낮은 남유럽 국가들에 직격탄이다.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 간의 10년물 국채 금리 차이(스프레드)가 벌어지며 유로존 재정 위기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다.
둘째 외환 시장이다. 방위비 부담에 따른 유럽의 재정 건전성 악화 우려는 유로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한다. 다만 유럽 내 대규모 방산 투자 기대감으로 자본이 유입되는 변수가 상충하며 변동성을 키운다.
셋째 방산 경쟁이다. 늘어난 무기 예산의 향방을 두고 미국 방산 대기업과 기술 자립을 외치는 유럽 현지 방산 업체 간의 수주 경쟁이 격화된다. 유럽 방산업체들은 정부의 장기 구매 보장이 없다면 대규모 공장 증설에 나서기 어렵다는 태도다.
앞으로 시장을 지켜보는 투자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주시해야 할 지표는 세 가지다. 유럽 주요국의 GDP 대비 국방비 지출 추이와 예산안 승인 여부, 유럽 방산기업의 설비투자(CAPEX) 증가율, 유로존 국채 금리와 유로화 가치 변동이다.
앙카라 정상회의 진행 과정에서 도출되는 국가별 이행 계획은 유럽이 안보 위기를 극복할 재정 체력을 가졌는지 검증하는 시험지가 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