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자국의 역설…"환율 움직인 건 무역 아닌 자본" 외신 진단
외국인 올해 116조 순매도, 서학개미 미국 주식 잔액 314조
외국인 올해 116조 순매도, 서학개미 미국 주식 잔액 314조
이미지 확대보기원·달러 환율이 8일 1555.20원에 개장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 이후 17년 3개월 만에 가장 높은 개장가다. 코스피는 올해 한때 100% 가까이 폭등해 세계 최강 증시에 올랐지만, 원화 가치는 거꾸로 추락하고 있다.
영국 자산운용사 애시모어와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등 해외 기관은 이 비대칭을 한국 경제 부실이 아니라 "자본 흐름이 무역 흑자를 압도하는 구조 전환"으로 본다. 지수 상승이 외국인 순매수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증시와 환율의 전통적 동행 관계가 약해지고 있다.
흑자국 통화의 역설
한국은 명백한 경상수지 흑자국이다. 한국은행이 5일 발표한 4월 국제수지 잠정치를 보면 4월 흑자는 282억 9000만 달러(약 43조 7500억 원)로 역대 두 번째다. 1~4월 누적 흑자는 1026억 7000만 달러(약 158조 7900억 원)에 이른다. 통상 흑자가 쌓이면 달러 공급이 늘어 원화가 강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 현상이 굳어지고 있다.
해외 기관은 원인을 '환전 공백'에서 찾는다.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로 환전되지 않고 해외에 재투자되는 현상이다. 애시모어는 지난 4월 보고서에서 "국내 저축자가 원화를 헐어 해외 자산을 대규모로 사들인다"고 진단했다. 흑자를 넘어서는 자본이 빠져나가면 원화는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BofA도 별도 분석에서 "원화는 거시 변수가 아니라 포트폴리오 자금 흐름이 좌우한다"고 봤다. 외국인 주식 매도와 해외투자가 흑자 효과를 상쇄한다는 진단이다.
외국인 116조 순매도, 서학개미 잔액 314조
달러가 국내로 돌아오지 않는 통로는 두 갈래다. 첫째, 외국인의 차익실현이다. 외국인은 지난달 7일부터 5일까지 20거래일 연속 순매도했다. 올해 누적 순매도는 116조 6000억 원에 이른다. 외국인은 국가별 투자 비중을 일정 범위에서 관리한다. 주가가 오르면 한국 비중이 자동으로 커지고, 기계적 차익실현이 촉발된다. 매도 대금을 달러로 바꾸는 과정이 원화를 끌어내린다.
둘째, 국내 자본의 자발적 해외 이동이다. 한국예탁결제원 세이브로 기준 5월 말 서학개미의 미국 주식 보관액은 2036억 달러(약 314조 원)로 사상 최대였다. 두 달 전인 3월 말 1541억 달러(약 238조 원)보다 30% 넘게 불었다. 두 달 연속 순매도였는데도 미국 기술주 급등에 평가액이 되레 커졌다. 여기에 인플레이션감축법(IRA)·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을 노린 대기업 현지 투자가 더해지며, 수출 대금이 미국에서 재투자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글로벌 IB의 환율 전망도 약세 쪽이다. 노무라와 바클레이스는 지난해 말 보고서에서 1400원대를 새 기준선으로 제시했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4.5%를 웃돌고 자본 유출이 이어지면 1600원 상단을 시험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시장에서 거론된다.
'블랙프라이데이'가 드러낸 쏠림
이 구조적 약점은 지난 5일 폭발했다. 코스피는 5.54% 급락해 8160.59에 마감했고 장중 매도 사이드카가 걸렸다. 미국 브로드컴의 인공지능(AI) 칩 매출 전망이 시장 기대를 약 12억 달러(약 1조 8500억 원) 밑돈 것이 방아쇠였다.
그러나 같은 뉴스에도 한국 증시가 더 크게 흔들렸다. AI 반도체 기대가 과도하게 반영된 지수 구조에서 단일 악재가 레버리지 청산과 맞물리며 낙폭을 키웠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종목이 코스피 시가총액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쏠림에, 신용융자 잔고는 4일 기준 37조 7400억 원으로 역대 최고였다. 삼성전자는 6.40%, SK하이닉스는 9.92% 급락했다.
자본 유출은 5일 하루의 일이 아니다. 앞서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중순 신흥 아시아에서 한 주 동안 약 170억 달러(약 26조 2900ᅟᅥᆨ 원)가 빠져나갔다며 역대 두 번째 주간 유출로 집계했다. 미국 AI 자본 집중이 다른 시장의 돈을 빨아들인다는 분석이다.
수출주엔 완충, 내수·에너지엔 직격탄
원화 약세 충격은 업종마다 갈린다. 달러로 매출을 잡는 수출기업은 원화 환산 매출이 늘어 수입 원가 상승을 일부 상쇄한다. 다만 그 완충은 부품난과 에너지 비용 앞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반도체 업계는 공정에 필수적인 희귀가스(헬륨·네온 등)를 중동에 크게 의존한다. 유가가 오르면 전기료 인상으로 번져 가격 경쟁력을 갉아먹는다고 업계는 우려한다. 원유·천연가스를 수입에 기대는 정유·석유화학·항공은 고환율과 고유가의 이중 압박을 받는다.
증시 강세론 자체는 살아 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3일 12개월 코스피 목표치를 1만 2000으로 올렸다. 당시 종가 대비 35% 넘는 상승 여력으로,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시장이 저평가했다며 비중 확대 의견을 유지했다. 다만 강세론은 기업 이익에 한정되며, 환율에 대한 단정적 매도 의견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투자자가 지켜볼 세 지표
전문가들은 환율 레벨보다 자본 흐름의 방향을 보라고 조언한다. 첫째,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4.5%를 계속 웃도는지 여부다. 글로벌 자금의 기준 금리로, 이 선을 넘으면 신흥국 통화 동반 약세를 자극한다. 둘째, 한국예탁결제원 세이브로의 외화증권 보관액이다. 개인 자본 유출의 실시간 지표다. 셋째, 수출 대기업의 배당 송금 시기다. 4월 배당기 외국인 역송금 수요는 환율 상단을 밀어 올리는 단기 방아쇠다.
1500원대 환율은 위기의 신호가 아니라, 자본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시대의 결과다. 자산을 지키는 첫걸음은 환율판의 숫자가 아니라 돈의 방향을 읽는 데서 시작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