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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현대판 노예' 6000명…러시아 유령선에 버려진 선원들 '충격’

유기 선박 1년 새 30% 급증…배후엔 제재 피하려는 '유령 함대'
체불 임금 340억 원 달해…'편의치적' 악용한 선주들 무책임에 인권 사각지대
국제 제재를 피하려 정체를 숨긴 채 운항하던 이른바 '유령 함대' 선박들이 경영난과 규제를 이유로 선원들을 태운 채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국제 제재를 피하려 정체를 숨긴 채 운항하던 이른바 '유령 함대' 선박들이 경영난과 규제를 이유로 선원들을 태운 채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바다 위 거대한 감옥이 늘고 있다. 국제 제재를 피하려 정체를 숨긴 채 운항하던 이른바 '유령 함대' 선박들이 경영난과 규제를 이유로 선원들을 태운 채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
국제운송노련(ITF)은 지난해에만 전 세계에서 410척의 선박이 유기됐으며, 이로 인해 6223명의 선원이 임금 체불과 기아 상태에 빠졌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 대비 30% 이상 급증한 수치다. 영국 BBC 뉴스는 지난 9일(현지 시각) 이 같은 비인도적 해상 유기 실태와 그 배후의 지정학적 원인을 심층 보도했다.

“굶주림과 분노만 남았다”…러시아 원유 실은 유조선의 비극


현재 중국 인근 국제 수역에는 러시아산 원유 약 75만 배럴을 실은 유조선 한 척이 떠 있다. 시가 5000만 달러(약 728억 원) 상당의 화물을 싣고 있지만, 배 안의 사정은 참혹하다. 이 배의 선임 갑판원인 러시아인 이반(가명)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식료품과 식수가 끊겨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처지”라며 “선원들은 굶주림과 분노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선박은 지난해 11월 러시아 극동지역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으나, 선주가 수개월째 임금을 체불하면서 12월 유기 선박으로 분류됐다. 중국 당국은 국제적 감시와 제재 위반 논란을 의식해 이 배의 입항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배는 갈 곳을 잃은 채 공해상을 떠돌고 있으며, 선원들은 배에 갇힌 미아가 됐다.

서방 제재가 낳은 괴물 '유령 함대'…감시망 피하려 유령선 자처


선박 유기가 이처럼 폭증한 원인으로는 ‘유령 함대(Shadow Fleet)’의 확산이 꼽힌다.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 등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는 국가들이 원유를 수출하려고 노후 선박을 사들여 정체를 숨긴 채 운영하는 방식이다.

2016년 20척 수준이던 유기 선박은 유령 함대가 본격화된 지난해 410척으로 20배 넘게 늘었다.

이들 선박은 주로 규제가 느슨한 ‘편의치적(FOC)’ 국가에 등록한다. 파나마, 라이베리아와 더불어 최근에는 감비아가 새로운 조세 피난처로 떠올랐다. 감비아는 2023년까지 등록 유조선이 한 척도 없었으나 지난해 3월 기준 35척으로 급증했다.
이들 선박은 보험에 가입되지 않았거나 소유주를 추적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 문제가 생기면 선주가 배와 선원을 통째로 버리고 잠적하기 일쑤다.

실제로 지난해 유기 선박의 82%(337척)가 편의치적 선박이었다. 스테판 코튼 ITF 사무총장은 “선원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계약서에 서명하고, 결국 바다 위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게 된다”라며 선주들의 의도적인 책임 회피를 강하게 비판했다.

인도·필리핀 선원 피해 집중…국제적 공조 절실


국제해사기구(IMO)와 국제노동기구(ILO)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유기된 선원들의 체불 임금은 2580만 달러(약 375억 원)에 이른다. 이 중 ITF가 개입해 회수한 금액은 60% 수준인 1650만 달러에 불과하다. 국적별로는 인도 선원이 1125명(18%)으로 가장 많았고 필리핀(539명)과 시리아(309명)가 뒤를 이었다.

전문가들은 선박 등록 국가가 선주와 선원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지는 ‘진정한 연고’ 원칙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마크 디킨슨 나우틸루스 인터내셔널 사무총장은 “편의치적 제도가 선원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완전히 방기하게 만들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바다 위 인권 유린을 막으려면 개별 국가의 규제를 넘어선 강력한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굶주림에 지친 이반은 “앞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제재 대상이나 불량 선박인지 철저히 확인하고 배를 탈 것”이라며 씁쓸한 다짐을 전했다.


서진욱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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