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램 재고 17주→2주 '증발'…범용 라인 뜯어내자 공급망 마비
中샤오미 등 "폰 가격 30% 인상"…2027년까지 '반도체 품귀'
中샤오미 등 "폰 가격 30% 인상"…2027년까지 '반도체 품귀'
이미지 확대보기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전례 없는 '이중 옥죄기(double squeeze)'에 직면했다. 인공지능(AI) 열풍이 촉발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폭증으로 반도체 제조사들이 생산 라인을 대거 재편하자, 역설적으로 PC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범용(Legacy) 메모리 공급이 끊기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일부 제품 가격은 지난 2월 이후 두 배 이상 폭등했으며, D램 재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은 "가격은 묻지 않을 테니 물량만 달라"며 공급사 앞에 줄을 섰고,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소비자 가격의 최대 30% 인상을 경고하고 나섰다. 단순한 부품 부족을 넘어 글로벌 거시경제(Macroeconomy)를 위협하는 인플레이션 요인으로 비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AI가 부른 '범용 칩 실종'
3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이 반도체 제조사 및 유통업체 임원 17명을 포함해 40여 명의 업계 관계자를 인터뷰한 결과, 현재의 메모리 대란은 반도체 업계가 첨단 AI 반도체 수요를 맞추기 위해 벌인 '속도전'이 낳은 결과물로 확인됐다.
2022년 11월 챗GPT 출시 이후 생성형 AI 붐이 일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메모리 기업은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탑재되는 HBM 생산에 사활을 걸었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중국 경쟁사들이 저가 D램 공세를 펼친 점도 한국 기업들이 수익성이 높은 HBM으로 생산 능력을 급선회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메모리 제품인 DDR4나 LPDDR4(스마트폰용) 생산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당초 올해 말까지 PC와 서버에 쓰이는 구형 DDR4 칩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고객사에 통보했었고, 마이크론 역시 6~9개월 내에 DDR4 및 LPDDR4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지난 6월 밝혔다.
그러나 시장의 흐름은 제조사들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데이터센터와 PC의 교체 주기가 도래하고 스마트폰 판매가 예상보다 호조를 보이면서, 구형 칩에 대한 수요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폭발한 것이다. 댄 허치슨 테크인사이트 선임 연구위원은 "업계가 완전히 허를 찔렸다(caught off-guard)"고 분석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D램 공급업체의 평균 재고는 2024년 7월 3~8주 수준에서 10월에는 2~4주 분량으로 급감했다. 불과 몇 달 전인 2024년 하반기 초만 해도 13~17주 수준이었던 재고가 순식간에 증발한 것이다.
"물량 달라" 줄 선 빅테크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은 지난 10월 마이크론에 "가격과 상관없이 공급 가능한 모든 물량을 받겠다"는 식의 사실상 '백지 위임' 주문을 넣은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 기업들의 움직임은 더욱 다급하다.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텐센트 등은 10월과 11월 임원진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본사로 급파해 물량 배정을 읍소했다. 업계 관계자는 "모두가 공급을 구걸(begging)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 산업 포럼에서 이러한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최 회장은 "요즘은 메모리 공급 요청을 하는 기업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라며 "공급을 못 하면 해당 기업은 사업 자체를 못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오픈AI는 2029년까지 월 90만 장의 웨이퍼가 필요한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를 위해 10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예비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현재 전 세계 HBM 생산량의 두 배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메모리 제조사들은 부랴부랴 감산 계획 철회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DDR4 생산 중단 계획을 뒤집고 생산을 지속하기로 결정했으며, 윈본드 등 대만 업체들도 설비 투자액을 11억 달러로 대폭 늘리는 안건을 승인했다. 하지만 새로운 생산 시설을 짓는 데 최소 2년이 소요된다는 점이 문제다. 씨티(Citi)그룹은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2027년 말까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폰 가격 30% 급등… 물가 '직격탄'
반도체 수급난은 즉각적인 소비자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스마트폰, USB 드라이브, PC 등 일반 소비자용 전자기기 가격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인도 리얼미(Realme)의 프란시스 웡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례 없는 메모리 비용 상승"이라며 "내년 6월까지 휴대전화 가격이 20%에서 30%까지 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카메라나 프로세서, 배터리 등은 원가 절감이 가능하지만, 저장장치 비용은 제조사가 흡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토로했다. 샤오미 역시 가격 인상과 프리미엄 모델 판매 확대로 비용 상승분에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에서는 이미 '배급제'가 등장했다. PC 부품 판매점 아크(Ark)는 11월 1일부터 하드디스크, SSD, 시스템 메모리 등을 합쳐 1인당 최대 8개까지만 구매할 수 있도록 제한을 뒀다. 현지 매장 직원들은 "최근 몇 주 사이 가격이 급등했으며 일부 품목은 재고의 3분의 1이 동났다"고 전했다. 게이머들이 선호하는 32기가바이트(GB) DDR5 메모리 가격은 10월 중순 약 1만7000엔에서 현재 4만7000엔 이상으로 폭등했고, 고급형 128GB 키트는 두 배 넘게 뛴 18만 엔에 거래되고 있다.
사재기 기승, 중고칩도 '금값'
시장의 불안심리를 노린 투기 세력까지 가세하며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의 한 DDR4 판매상은 가격 상승을 예상하고 2만 개의 재고를 미리 비축해 뒀다고 밝혔다. 중국 선전의 부품 유통업체 폴라리스 모빌리티의 에바 우 영업 매니저는 "가격 변동이 너무 심해 과거 월 단위로 내던 견적을 이제는 매일, 심지어 매시간 단위로 갱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품 칩을 구하지 못한 수요는 중고 시장과 재활용 칩 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폐기된 서버의 저사양 메모리 칩을 재활용해 판매하는 '카라몬(Caramon)'의 폴 코로나도 대표는 "9월 이후 월 매출이 50만 달러에서 80만~90만 달러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그가 취급하는 제품의 대부분은 홍콩 중개상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아키하바라의 중고 PC 부품 매장 'iCON' 역시 신품 가격 급등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거시경제 흔드는 '반도체 인플레'
전문가들은 이번 메모리 대란이 단순한 산업 이슈를 넘어 거시경제의 리스크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산치트 비르 고기아 그레이하운드 리서치 CEO는 "메모리 부족 사태는 이제 부품 수준의 우려를 넘어 거시경제적 위험으로 격상됐다"며 "AI 인프라 구축 수요가 물리적 공급망의 한계와 충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부족한 반도체 공급은 AI 기반의 생산성 향상을 지연시키고, 수천억 달러 규모의 디지털 인프라 투자를 뒤로 미루게 할 공산이 크다. 익명을 요구한 한 메모리 업체 임원은 "이번 부족 사태로 미래 데이터센터 건설이 연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각국 정부가 고물가와 관세 정책 등으로 씨름하는 상황에서 환영받지 못할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카운터포인트 리서치는 올 4분기 메모리 가격이 30% 상승하고, 2026년 초에 추가로 20% 더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10월 방한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치킨 회동을 가지며 공급망을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전체를 짓누르는 공급 부족의 파고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SK하이닉스가 2026년 물량까지 매진(Sold out)됐다고 밝힌 상황에서, AI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반도체 생태계의 불균형은 당분간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