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100만弗 기부·백악관 3차례 방문에도 '냉대'...영업이익 절반이 미국서 나오는데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7일(현지시간) 현대차가 트럼프 행정부의 혼란스러운 경제·이민 정책을 미리 읽고 대응하려다 실패한 대표 사례가 됐다고 보도했다.
210억 달러 투자 약속, 관세 면제는 못받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해 11월 트럼프의 재선 이후 기업들이 흔히 택하는 방식으로 미국 행정부에 접근했다고 WSJ은 전했다. 현대차는 트럼프 취임식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고, 수 주 뒤에는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와 그의 딸을 토리파인스 PGA 토너먼트 프로암 행사에 초청했다.
올해 3월에는 트럼프 2기 임기가 끝나기 전 실행할 약 210억 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를 약속했다. 이 투자 약속 덕분에 정의선 회장과 현대차 임원들은 백악관을 방문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내 관세가 매우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증거"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며칠 뒤 트럼프가 전 세계 자동차 수출품에 25%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을 때, 현대차는 예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WSJ은 보도했다. 이후에도 현대차는 미국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더 많은 조치를 취했다. 지난 4월 인기 있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생산을 멕시코 기아 공장에서 앨라배마 기존 공장으로 옮기겠다고 밝혔고, 미국 내에서 더 많은 부품을 조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8월 25일 한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난 뒤 몇 시간 만에, 이 자리에 동행한 정의선 회장은 50억 달러(약 7조 원) 규모의 추가 미국 투자를 발표했다.
조지아 공장서 한국인 317명 수갑·족쇄 채워져...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며칠 뒤인 지난 9월 4일, 현대차가 76억 달러(약 10조 원)를 쏟아부은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단지에서 미국 이민세관집행국(ICE)의 급습이 단행됐다. 연방 요원들은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함께 운영하는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덮쳤고, 약 450명을 체포했다. 이 중 300명 이상이 한국인 화이트칼라 근로자였으며, 이들은 수갑과 족쇄를 찬 채 구금됐다고 WSJ은 전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단일 사업장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속이었다. 수색 영장은 원래 히스패닉계 근로자 4명을 겨냥했지만, 결과는 이 공장의 한국인 인력 의존도에 전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서울 정부 관계자들은 구금된 한국인들이 대부분 전자여행허가제(ESTA) 비자면제 프로그램이나 B-1 단기 비즈니스 방문 비자로 입국해 장비 설치 자문 등 미국인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고 설명했다고 WSJ은 전했다.
한미상공회의소 제임스 김 회장은 WSJ에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미국인 근로자를 찾을 수 없다는 얘기를 오랫동안 들어왔다"고 말했다.
급습으로 이 공장 건설은 약 두 달 지연됐다. 트럼프는 급습 직후 조지아 공장에 "불법 체류자가 많이 일했다"고 말했지만, 며칠 만에 입장을 바꿔 특정 외국인 근로자는 미국에서 환영받는다고 강조했다. 한국 외교부는 당시 트럼프가 구금된 317명의 한국인에게 미국인을 훈련시키기 위해 더 오래 머물러달라고 요청해 석방이 하루가량 늦춰졌다고 밝혔다. 지난 9월 11일 애틀랜타에서 귀국 전세기가 떠날 때, 317명 중 316명이 귀국을 선택했다.
미국 영업이익 비중 50% 넘어...중국·러시아 철수로 의존도 심화
현대차그룹이 미국 시장에 이처럼 매달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WSJ은 현대차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이 현재 미국에서 나온다고 보도했다. 지금 미국에서 팔리는 신차 10대 중 1대 이상이 현대차나 기아차다. 지난 3일 현대차는 9월 미국 판매가 지난해보다 14% 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의 관세는 타격을 입혔다. 지난 4월부터 시행된 관세 때문에 최근 분기 순이익이 전년 대비 22% 줄었다. 현대차는 관세에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바이든 시대 전기차 세액공제가 끝나자, 현대차는 이달부터 가격을 낮추거나 현금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다른 주요 시장에서는 급격히 쇠퇴했다. 2016년 현대차와 기아는 중국에서 약 180만대를 팔며 시장 점유율 7%를 기록했지만, 이듬해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중국이 반발하면서 타격을 입었다고 코리아인베스트먼트앤시큐리티즈는 분석했다. 현재 현대·기아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1% 미만이다.
2021년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자동차 브랜드였던 현대·기아는 이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공급망 문제가 생기면서 철수했다. 2023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팔았다고 WSJ은 전했다.
코리아인베스트먼트앤시큐리티즈의 김창호 애널리스트는 WSJ 인터뷰에서 "미국은 현대차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 사이 '샌드위치 처지'
현대차는 급습 뒤에도 260억 달러(약 36조 원) 규모의 미국 투자 약속을 공개로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정부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았다고 WSJ은 보도했다. 사정을 아는 소식통들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현대차가 무역 협상에서 한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 대통령실은 논평을 거부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은 무역 협상을 진행 중이다. 아직 서명하지 않은 무역 협정은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97조 원)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중심으로 하며, 그 대가로 트럼프 행정부는 자동차를 포함한 여러 품목에 매기는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했다고 WSJ은 전했다. 현대차는 이 관세 협상의 주요 변수다.
백악관 대변인 쿠시 데사이는 WSJ에 "트럼프 대통령이 분명히 밝혔듯이, 행정부는 미국에 투자하는 모든 기업과 함께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성명을 통해 한국 정부가 미국에서 한국 기업의 사업을 지원하려는 노력을 인정한다며, 내년이면 미국 진출 40주년을 맞으며 현재까지 총 450억 달러(약 63조 원) 이상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회사는 "이런 투자 결정은 미국에서 지속 성장과 기회를 약속하는 현대차의 장기 비전에 따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의선 회장 "미국과 함께 모빌리티 미래 건설"...무노즈 CEO 체제로 미국 중심 강화
정의선 회장은 2020년 아버지에게서 경영권을 물려받아 3세대 리더가 됐다. 1990년대 닷컴 붐 시절 실리콘밸리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기술 전문가로 자처하며 아버지, 할아버지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고 WSJ은 전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그는 2011년 기아가 NBA 덩크 대회 후원사가 되도록 했다. 그해 우승자 블레이크 그리핀은 기아 옵티마 위로 뛰어넘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현대차 아메리카의 전 CEO 존 크래프식은 WSJ에 10년 전 서울에서 열린 저녁 가라오케 자리를 떠올리며 "당시 부회장이었던 정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퀸의 '라디오 가가'를 열창한 뒤 드럼 키트를 가져와 몇 곡을 더 연주했다"며 "그는 인간미 넘치는 모습 보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 직후, 정의선 회장은 스페인 태생의 호세 무노즈를 현대차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했다.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현대차 CEO가 된 것은 처음이다. 이 결정은 "여권보다 성과" 시대를 열겠다는 정 회장의 바람을 보여줬다. 닛산에서 카를로스 곤의 부하였고 현대차 미국 사업을 이끌어온 무노즈는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다. 이 인사는 현대차 사업에서 미국의 커지는 중요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올해 3월 메타플랜트 단지 개소식에서 정의선 회장은 뒤편에 걸린 대형 성조기 앞 연단에 섰다. 흰색 안전모를 쓴 공장 근로자들이 그를 환호했다. 조지아 주지사 브라이언 켐프는 다른 주요 인사들과 함께 참석해 현대차 전기차에 사인했다. "우리는 미국과 함께 모빌리티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 말이다"라고 정 회장은 말했다고 WSJ은 보도했다.
현대차와 기아는 현재 미국에서 팔리는 차량의 약 40%를 현지에서 생산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여전히 한국에서 만들어진다. 2030년까지 경영진은 현지 미국 생산이 현지 판매의 80%를 차지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다.
구금됐던 한국인 317명 중 절반 이상이 ESTA로 입국했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은 B-1 비즈니스 방문 비자와 B-2 관광 비자를 갖고 있었다고 한국 국회의원이 공개한 기록에 나와 있다. 지난달 말 미국은 B-1 비자와 ESTA로 입국하는 한국인이 미국 공장 건설을 위해 해외에서 가져온 장비를 "설치하고, 점검하거나 수리"할 수 있다고 명확히 했다고 한국 외교부는 밝혔다. 워싱턴은 또 조만간 주한 미국 대사관에 특별 '비자 데스크'를 열어 관련 문의를 받기로 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