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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美, 스테이블코인 제도권 진입 임박…'예금 블랙홀' 우려에 떠는 은행들

이자 지급 금지한 '지니어스 법안' 통과에도…보상 프로그램 등 우회로 '여전'
재무부 "최대 6.6조 달러 유출 가능" 경고…은행 대출기능 위축, 실물경제 타격 우려
미국 하원이 스테이블코인 규제 내용을 담은 '지니어스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디지털 달러의 제도권 편입이 임박했다. 은행권은 스테이블코인이 최대 6조6000억 달러에 이르는 예금을 흡수하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며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축을 우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하원이 스테이블코인 규제 내용을 담은 '지니어스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디지털 달러의 제도권 편입이 임박했다. 은행권은 스테이블코인이 최대 6조6000억 달러에 이르는 예금을 흡수하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며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축을 우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 금융계의 '뜨거운 감자'인 스테이블코인이 합법화 수순에 돌입하자, 은행 시스템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8일(현지시각) 스테이블코인이 은행의 핵심 예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작용해, 대출 여력을 심각하게 잠식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 하원은 지난 18일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운영에 대한 기본 원칙을 담은 이른바 '지니어스 법안(The Genius Act)'을 찬성 308표, 반대 122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법안에 서명할 뜻을 내비쳐, 스테이블코인의 합법화는 이제 시간문제다. 이 법안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를 은행 자회사나 연방과 주 정부의 허가를 받은 '허가된 발행업체'로 한정하고, 발행할 때는 반드시 현금이나 단기 국채 같은 안전자산을 100% 담보로 설정하도록 했다. 또한, 발행사는 달마다 준비자산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며, 자금세탁방지(AML)와 고객신원확인(KYC) 등 엄격한 금융 규제를 준수해야 한다.

은행권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고객 예금의 대규모 이탈 가능성이다. 미 재무부는 지난 4월 보고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이 은행 계좌와 비슷한 수준의 수익률을 제공한다면, 은행 시스템에서 최대 6조6000억 달러(약 9197조 원)에 이르는 예금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은행의 대출 재원을 고갈시켜 기업과 가계의 자금 조달을 막고, 실물경제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공포를 자아낸다.

지니어스 법안이 정의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처럼 가격 변동성이 크지 않다. 미국 달러 등 주요 명목화폐와 가치가 1대 1로 연동되도록 설계돼, 안정된 결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는 주로 다른 암호화폐를 거래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에 머물러 있지만, 명확한 규제 체계가 마련되면 그 쓰임새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며칠이 걸리고 높은 수수료를 내야 하는 현재의 국경 간 송금 시스템을 대체할 빠르고 값싼 대안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이자' 아닌 '보상'…교묘한 규제 회피


핵심 쟁점은 '이자' 지급 문제다. 서클(Circle), 테더(Tether) 같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고객이 토큰을 구매한 자금을 미 국채 등 안전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얻는다. 코인베이스의 브라이언 암스트롱 최고경영자(CEO)는 이 수익의 일부를 토큰 보유자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지니어스 법안은 발행사가 보유자에게 직접 이자나 수익률을 주는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파트너십 등 교묘한 우회 방법을 써서 간접으로 수익을 제공하며 고객을 유인할 수 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보상' 프로그램이다. 코인베이스는 대표 스테이블코인인 USD코인(USDC) 보유 고객에게 해마다 4.10%의 보상을 제공한다. 이는 USDC 발행사인 서클이 운용 자산에서 얻은 이자 수익을 코인베이스와 공유하기에 가능한 구조다.

비평가들은 사실상 '이자를 주는 스테이블코인'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지만, 코인베이스 측은 보상 프로그램과 서클과의 수익 공유는 별개라는 주장을 고수한다. 이 때문에 미국 독립 지역은행가 협회(ICBA)는 이번 주 하원 지도부에 서한을 보내, 법안의 이자 지급 금지 조항이 무력화되지 않도록 모든 허점을 막아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은행 시스템의 안정을 해치는 또 다른 뇌관은 '비보장 예금'의 증가 가능성이다. 현재 미국 예금자 보호 한도는 25만 달러(약 3억4837만 원)다. 만약 한 고객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보호를 받는 계좌에서 돈을 빼 스테이블코인을 사면, 발행사는 이 자금을 다시 은행에 예치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 예치되는 계좌는 보호 한도를 훌쩍 넘는 거액의 법인 계좌여서, 만약 해당 은행이 파산하면 예금을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커진다.

더욱 근본 문제는 은행의 고유 기능인 '대출'이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은행은 예금을 바탕으로 기업과 가계에 자금을 공급하며 경제의 혈맥 노릇을 한다. 고객 자금이 은행을 떠나 스테이블코인으로 흘러 들어갈수록, 은행의 대출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컨설팅 회사 페더럴 파이낸셜 애널리틱스의 캐런 페트루 매니징 파트너는 "비은행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시스템, 곧 공공 유동성 공급 창구에 직접 접근한다면 이런 우려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니어스 법안은 이들의 연준 접근을 명확히 금지하지 않아, 결정권은 연준 관리들의 손에 남는다.

은행은 시장 위기 때 연준으로부터 유동성을 공급받는 대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엄격한 유동성 규제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는 이런 의무가 없다. 이런 '규제와 책임의 차이'는 불공정 경쟁을 일으킬 수 있다. 페트루 파트너는 "비은행 발행사들이 은행, 대출자, 경제 전반에 이익을 주는 대출에 자금을 쓰지 않고, 은행 예금을 흡수해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위기 속 기회 모색…'자체 코인' 발행도 검토

물론 모든 은행이 위협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일부 대형 은행들은 오히려 새로운 사업 기회를 엿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을 관리하거나, 발행사와 명목화폐 세계를 잇는 중개자 구실을 하며 수익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월마트와 아마존 같은 거대 기술, 유통 기업들이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나서자, 이에 맞서기 위해 대형 은행들이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꾸려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출시하는 방안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위협에 맞서 스스로 시장 참여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부상은 이처럼 미국 금융 지형의 근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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