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업계가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의 기업도 중국에 첨단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를 팔지 못하도록 규제를 확대할 것을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정부가 현재 시행하는 중국에 대한 독자 수출통제를 동맹국 기업이 포함된 다자 체제로 확대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31일(현지시간) 미국 정부 관보에 따르면 SIA가 지난 17일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가 동맹국에 비해 복잡하고 포괄적이어서 미국 기업들이 경쟁에서 불리하다고 밝혔다.
SIA는 미국 기업들이 수출통제 대상으로 명시하지 않은 품목이라도 첨단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면 중국에 일체 수출할 수 없고, 이미 판매한 장비에 대한 지원 서비스도 제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일본, 한국, 대만, 이스라엘, 네덜란드의 외국 경쟁사들은 품목별 수출통제(list-based control) 대상이 아닌 장비를 중국의 첨단 반도체공장에 수출할 수 있고, 관련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SIA는 미국 정부가 동맹국에 미국과 유사한 수출통제를 도입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관은 미국과 동맹국의 반도체 장비 생산국들이 같은 품목을 통제하고 같은 허가 절차를 두는 다자 수출통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KLA, 램리서치 등 미국의 주요 반도체 장비 기업도 별도의 의견서에서 유럽연합(EU), 일본, 한국, 등 다른 동맹국의 경쟁사와 미국 기업 간 차등 없는 규제 경기장 조성을 요구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미국 기업을 대상으로 18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nm 이하 로직칩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수출통제 조처를 발표했다. 미국은 이어 반도체 핵심 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중국에 대한 수출통제 동참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현재 세계 4대 반도체 장비업체는 미국의 어플라이 머터리얼스와 램 리서치, 일본의 도쿄일렉트론, 네덜란드의 ASML이다. ASML은 최첨단 공정에 필요한 EUV 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한 회사이다.
미국 정부가 자국산 최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통제 조치를 강화하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가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었다. 삼성전자는 중국에서 2개의 대형 반도체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SK 하이닉스는 미국 인텔 낸드플래시 메모리칩 생산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고 이 통신이 지적했다.
미국이 반도체와 양자컴퓨터 등 첨단기술이 적성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과 새로운 다자 수출통제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 미국 정부에서 수출통제를 총괄하는 엘렌 에스테베스 상무부 산업안보 차관은 지난해 12월 12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경제안보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바세나르를 비롯한 기존 다자 수출통제 체제가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새로운 장치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한국 등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냉전 시대 서방 국가들이 공산권에 대한 전략 물품 수출을 막았던 장치인 ‘대공산권수출조정위원회(COCOM·코콤)’와 같은 다자주의적 통제 체제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코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 무기와 핵기술이 옛 소련과 공산국가들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일본, 호주가 참여한 수출통제 체제다. 미국 등 서방은 냉전이 종식되자 1994년 코콤을 해체하고, 1996년 러시아와 중국 등이 참여해 테러 단체들에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 품목 수출을 통제하는 ‘바세나르 체제’를 출범시켰다. 바세나르에는 한국,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42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미·중 간 대결로 바세나르 체제가 유명무실해짐에 따라 미국은 코콤처럼 미국의 동맹국이 참여하고, 바세나르처럼 전략 기술의 수출을 규제하는 신코콤 체제를 구축하려고 한다. 미국이 AI용 반도체, 바이오, 슈퍼컴퓨터, 클라우드 컴퓨팅 등으로 수출통제 범위를 확대하고, 한국 등 동맹국의 동참을 요구하면 한국 기업들의 중국 진출에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