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통증은 크게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육체적 통증은 신체가 손상되었을 때 나타나기도 하고, 손상된 부위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어깨 회전근개가 손상되면 팔을 일정한 높이 이상 들어 올리기 어려워지고, 오십견이 생기면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지속되기도 한다. 석회성 건염이나 근육과 근막의 손상 역시 통증을 일으킨다.
통증은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다. 우리 몸은 손상된 부위를 보호하고 회복하기 위해 반응한다. 물론 통증이 언제나 회복의 과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손상이 지속되거나 염증이 악화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통증이 우리에게 몸의 상태를 돌아보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통증은 어떨까.
마음의 통증은 이미 가진 것을 잃었을 때, 또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나타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과 사랑받고 싶은 열망, 이루지 못한 꿈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육체적 통증이 신체의 손상에서 비롯된다면, 정신적 통증은 상실과 결핍, 그리고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통증에는 육체적 통증과 다른 점이 있다.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무엇을 해야 나을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로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기억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기도 한다.
어릴 적에 본 영화 한 편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배경으로 젊음의 고뇌와 사랑을 겪는 황태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다. 영화도 인상적이었지만, 내 기억에 더욱 깊이 남은 것은 마리오 란자가 부른 주제가 'Drink, Drink, Drink'였다. 특히 그 노래의 가사 속에서 만난 ‘열망을 아는 자’라는 구절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열망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원한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기에 괴로워하고, 그것을 얻지 못해 아파하며, 때로는 그 열망을 붙들고 자신의 삶을 견뎌 내는 일일 것이다. 열망이 없다면 실망도 없을 것이고, 원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얻지 못해 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통증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감각일 뿐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감각이기도 하다. 통증은 우리에게 결핍을 알려주고, 결핍은 다시 열망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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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나는 이 지점에서 그림을 생각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려는 마음도 어쩌면 이러한 통증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할 때가 있다. 마음속에는 어떤 형상이나 감각이 맴돌지만,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붓을 들어 화면에 옮기려 해도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 표현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나는 그 간극에서 통증을 느낀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통증을 없애는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통증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며,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붓을 움직이고 색을 쌓고 지우는 동안 막연했던 감각은 조금씩 형태를 얻는다.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마음속의 통증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화면에 담기고, 어떤 것은 끝내 표현되지 못한 채 남는다.
바로 그 남겨진 부분 때문에 그림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림은 통증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통증을 형상으로 바꾸는 일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선과 색이 되고, 붙잡을 수 없는 기억이 화면 위의 흔적이 된다. 통증은 그림 속에서 다른 존재 방식으로 옮겨 간다. 그것은 더 이상 내 안에서만 맴도는 감정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형상이 된다.
이때 그림은 치유와도 다르다. 치유가 상처를 회복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때로 상처를 완전히 없애지 않은 채 그것이 존재할 자리를 마련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통을 단순히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바라보고, 그것을 선택하고, 다듬고, 때로는 왜곡하면서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 낸다. 사적인 통증이 타인에게도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형식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통증이 저절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픔이 깊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통증과 형상 사이에는 선택과 판단, 기술과 시간이라는 또 다른 과정이 놓여 있다. 예술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어쩌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직 표현하지 못한 것이 있고, 아직 이해하지 못한 마음이 있으며, 끝내 해소되지 않은 열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붓을 든다.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에도 통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화면 위에 남는다. 내 안에서 나를 괴롭히던 것이 이제는 내가 바라볼 수 있는 형상이 되고, 나만의 것이었던 감정이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경험과 만날 가능성을 얻는다.
나는 그림을 통해 통증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통증과 함께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을 찾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열망이 통증을 낳고, 통증이 형상을 찾으며, 형상은 다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 닿는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며, 예술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미지 확대보기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