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전기요금 선납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활용 규모는 달랐다.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실이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기요금 선수금 실적은 3933억 원으로, 모두 공공 부문에서 납부했다. 최근 5년간 민간 기업의 선납 사례는 없었다. 한전이 이번에 제안한 25조 원은 지난해 전체 선수금 실적의 약 64배에 이른다.
지난 1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제안의 배경이 드러났다.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이 선납을 요청한 이유를 묻자 김재군 한전 전력계통부사장은 사채 발행 한도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한국전력공사법에 따라 사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5배까지 늘린 특례가 2027년 말 종료되기 때문이다. 긴급한 경우 주무부처 장관 승인으로 6배까지 허용되는 예외도 사라지고 원칙적인 한도인 2배로 돌아간다.
한전의 고민은 이해할 만하다. 210조 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전력망 확충이라는 국가적 과제까지 수행해야 한다. 한전채 발행이 늘어나면 채권시장에서 민간 기업의 자금조달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공기업의 재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 기업의 미래 지출을 선납받는 방식이 적절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한전도 나름의 유인을 제시했다. 국고채와 한전채 금리의 중간 수준으로 이자를 지급해 기업에도 금융 수익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기업이 자금을 운용할 때 따져야 할 것은 이자율만이 아니다. 수년에 걸쳐 지출할 자금을 미리 납부하면 필요한 시점에 활용할 수 있는 유동성이 줄어든다. 금융 수익 못지않게 자금 운용의 선택권이 중요한 이유다.
특히 반도체는 투자 시점을 놓치는 것이 곧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산업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DS) 부문 시설투자에 47조5000억 원을 집행했다. SK하이닉스 역시 지난해 전체 시설투자에 30조1730억 원을 투입했다. 한전이 요청한 선납액은 각사의 연간 투자액 대비 각각 약 42%, 17%에 해당한다. 물론 선납액에는 원래 납부해야 할 전기요금도 포함돼 있어 전액을 추가 부담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도 수년치 지출을 앞당기는 부담은 작지 않다.
두 기업이 반도체 호황의 수혜를 누리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앞으로 5년간의 업황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메모리 가격과 수요가 빠르게 변하는 산업에서 투자 재원을 언제, 어디에 투입할지는 기업의 핵심 경영 판단이다. 전기요금을 미리 내고 이자를 받는 것이 유리한지 역시 기업이 결정할 일이다.
더욱 주목할 대목은 한전 수장의 발언이다. 김동철 사장은 국감에서 "한전의 재무 문제를 기업들의 선납으로 해결한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채 발행 한도 축소에 대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여유자금을 활용하려 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한전의 재무 부담을 기업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실제 자금조달 구상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전기요금 선납은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한 자금조달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공기업 재무구조 개선의 근본적인 해법으로 삼기는 어렵다. 사채 발행 한도 특례 종료에 대비한 자구노력과 재무개선 계획을 구체화하고, 전력망 투자에 필요한 정부 지원과 재원 조달 방식을 정하는 일은 정부와 한전의 몫이다.
국가전략산업 육성을 외치면서 정작 그 기업의 자금으로 공기업의 재무 부담을 덜어내려 해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기업은 국가 경쟁력을 위해 투자할 주체이지, 한전의 자금난을 해결할 은행이 아니다.
이다현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dh2@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