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잭슨홀(Jackson Hole)은 로키산맥의 웅장한 티턴 산맥과 그로스벤터 산맥 사이에 위치한 해발 2,100m의 거대한 산악 분지 지형이다. 만년설로 뒤덮인 티턴봉의 장엄한 자태와 에메랄드빛 잭슨 호수가 어우러진 이곳은 오늘날 세계적인 부호와 휴양객들이 찾는 명소로 꼽힌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 티턴 카운티이다.
글로벌 금융과 경제사의 궤적에서 잭슨홀은 단순한 여름철 피서지가 아니다. ‘홀(Hole)’이라는 지명은 9세기 초 모피를 찾아 깊은 산속을 헤매던 덫 사냥꾼(Mountain Men)들이 사방이 산맥으로 가로막힌 거대한 분지 지형을 부르던 은어에서 유래했다. 외부의 잡음과 물리적 간섭을 완벽히 차단한 채 은밀하고도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에 가장 적합한 천연의 요새다. 지리산이나 한라산 정상보다 높은 이 고지대 골짜기는 오늘날 전 세계 통화금융정책의 나침반이자 중앙은행 총재들의 성지로 통한다.
잭슨홀미팅의 뿌리는 캔사스시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학술 행사였다. 1978년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이 여름휴가철을 이용해 처음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주제는 농업금융이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내부의 소박한 지역 농업 금융 회의였던 것이다. 이 평범한 지방 회의가 일약 전 세계 자본시장의 향방을 가르는 최고 권위의 경제 정상회의로 격상된 결정적 계기는 1982년이다. 그당시 미국 경제는 제2차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아 물가가 두 자릿수로 치솟고 실업률이 급등하는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연준 의장이었던 폴 볼커(Paul Volcker)는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잡기 위해 1979년 10월 6일 토요일 밤, 예정에도 없던 임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전격 소집해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4%포인트 끌어올리는 사상 초유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른바 ‘토요일 밤의 학살’로 불린 이 조치 이후 볼커는 기준금리를 최고 21.5%까지 끌어올렸다.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고금리의 충격파는 즉각 실물경제를 강타했다.가장 극심한 타격을 입은 계층은 농기계 구입을 위해 대규모 대출을 받았던 농민들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 위기에 몰린 농민들은 수백 대의 트랙터를 몰고 수도 워싱턴 D.C.로 상경해 연준 본부 건물을 에워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건설업자와 중소기업인들은 연준으로 항의성 각목을 우편으로 보냈고,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남성이 연준 이사회 건물에 난입해 인질극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신변에 극심한 위협을 느낀 볼커 의장은 양복 품속에 실제 권총을 차고 회의에 참석해야 할 정도였다.
1982년 여름, 캔자스시티 연은은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시위대의 난입과 테러 협박으로부터 볼커 의장을 보호할 장소를 물색했다. 주최 측은 열렬한 플라이낚시 애호가였던 볼커의 취향을 고려함과 동시에, 시위대나 테러 세력이 물리적으로 접근하기 불가능한 천연의 요새를 선택했다. 그곳이 바로 로키산맥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잭슨홀이었다. 스태그플레이션과의 유혈 낭자한 전쟁, 그리고 살해 위협 속에서 피신하듯 열린 1982년 잭슨홀 미팅은 연준이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력한 결기를 전 세계에 천명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잭슨홀 미팅은 글로벌 중앙은행가들과 거물 경제학자들이 모여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진단하고 통화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티턴산의 계시’로 자리 잡았다. 2005년 라구람 라잔 전 인도 중앙은행 총재가 미국 금융 시스템의 잠재 부실과 글로벌 금융위기 가능성을 경고하며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곳도, 2010년 벤 버냉키 전 의장이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2차 양적완화(QE2)의 서막을 알린 곳도 바로 잭슨홀이었다. 2022년 제롬 파월 의장은 가계와 기업의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초강도 긴축을 지속하겠다는 8분간의 짤막하고 단호한 연설로 뉴욕 증시를 폭락시키며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결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2026년 잭슨홀 미팅은 과거 볼커의 결기 못지않은 거대한 긴장감과 역사적 무게감을 뿜어내고 있다. 제롬 파월 체제가 막을 내리고 취임한 신임 연준 의장 케빈 워시(Kevin Warsh)가 전 세계 중앙은행 총재들과 금융시장 관계자들 앞에서 갖는 첫 공식 데뷔 무대이자 시험대이기 때문이다.현재 글로벌 자본시장이 워시 의장을 바라보는 시선은 기대와 환호보다는 깊은 불신과 의혹으로 얼룩져 있다. 시장이 제기하는 가장 치명적인 쟁점은 ‘중앙은행의 독립성 훼손’과 ‘트럼프의 꼭두각시’ 논란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파월의 고금리 정책을 맹비난하며 공격적인 금리 인하를 집요하게 요구해 왔다. 그 정치적 압박의 연장선상에서 연준의 수장 자리를 꿰찬 워시가 백악관의 정치적 요구에 굴복하여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을 펴거나 금리 인상을 회피하는 대리인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는 월가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위협은 인플레이션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워시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통화 긴축 카드를 영구히 봉인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관세 장벽 강화와 글로벌 공급망의 파편화, 미국 연방정부의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로 인해 소비자물가지수(CPI)와 개인소비지출(PCE) 물가가 여전히 목표치(2%)를 웃돌며 재반등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물가 통제 책무를 사실상 방기하고 금리 인상을 회피한다는 인식이 확산될 경우, 채권시장은 연준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존 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신호가 떨어지면 채권시장은 장기 인플레이션 프리미엄을 가파르게 반영하며 미국 장기 국채를 투매하기 시작한다. 이는 곧 미국 장기 국채 금리의 폭등, 즉 국채 가격의 폭락을 초래한다.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가 이미 40조 달러를 훌쩍 넘어선 현실에서 국채 금리의 급등은 국가 재정의 이자 비용을 통제 불능 수준으로 폭증시키고, 상업용 부동산 대출과 중소형 은행 시스템을 연쇄 부실 위험으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뇌관이 된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억누르려 해도 시장이 알아서 시장 금리를 폭등시켜 실물경제를 파괴하는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의 부활이다.
워시는 과거 30대의 최연소 나이로 연준 이사에 발탁된 이후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모건스탠리를 비롯한 월가와 정부 간의 막후 조율사 역할을 수행한 베테랑 금융 전문가다. 그러나 취임 이후 연준의 전통적인 소통 방식인 포워드 가이던스(사전 안내)를 무력화하고, 점도표(Dot Plot) 공개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비전통적인 행보를 고수해 왔다. 시장과의 명확한 소통 없이 불투명한 태도로 일관한 그의 침묵은 오히려 채권시장과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키우는 자충수가 되고 있다.지금 세계는 티턴산에서 울려 퍼질 그의 첫 일성을 응시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