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TI는 대중에게는 공학용 계산기 제조사로 익숙할지 모르나, 반도체 산업사(史)의 관점에서 ‘현대 반도체 생태계의 모태(Matrix)’라거 할수 있다. 1958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집적회로(IC)를 발명하여 전자공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원천 기술의 발상지이다. 오늘날 파운드리 제국을 건설한 모리스 창(TSMC 창업자)을 비롯해 글로벌 반도체 거목들을 길러낸 인재의 요람이다.
최첨단 3nm 디지털 로직 반도체가 인간의 두뇌라면, 아날로그 신호와 전력을 제어하는 아날로그 반도체는 신경망과 심장, 혈관에 해당한다. 아무리 연산 속도가 뛰어난 AI 칩이라 할지라도 물리적 세계의 빛, 소리, 온도, 압력을 전기적 신호로 변환해 주는 센서와 이를 0과 1의 디지털로 바꾸어 주는 데이터 변환기(ADC/DAC), 그리고 시스템 전체에 정밀한 전력을 공급하는 전력관리반도체(PMIC) 없이는 단 1초도 작동할 수 없다. 이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에서 전 세계 1위 지위를 수십 년간 굳건히 수호하고 있는 기업이 바로 TI다.
TI의 출발점은 첨단 전자공학이 아닌 땅속을 뚫는 지하 탐사 산업이었다. 1930년 패트릭 해거티(Patrick E. Haggerty), 유진 맥더멋(Eugene McDermott), 세실 그린(Cecil H. Green), 존 에릭 존슨(J. Erik Jonsson) 등 4인의 선구자는 석유 매장지를 찾아내는 지구물리학 탐사 전문 기업 ‘지오피지컬 서비스(Geophysical Service Inc., GSI)’를 설립했다.당시 석유 탐사는 지표면에 폭약을 터뜨린 후 지하 지층에서 반사되어 돌아오는 미세한 음파 신호를 지진계로 정밀하게 포착·분석하는 고도의 신호 처리 기술이 요구되었다. 이 미세 신호 증폭 및 음향 분석 노하우는 훗날 TI가 전 세계 아날로그 신호 처리 기술의 최강자로 군사 장비 및 전자공학 분야로 전환하는 핵심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잠수함 탐지용 소나(SONAR) 및 군용 레이더 장비를 미국 해군에 공급하던 GSI는 1951년 사명을 현재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Inc.)’로 공식 변경하고 본격적인 전자 기술 전문 기업으로의 대전환을 선언했다.195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벨 연구소(Bell Labs)가 발명한 트랜지스터는 열에 취약하고 신뢰성이 낮은 '게르마늄(Germanium)' 기반이었다. 온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반도체 성질을 잃어버리는 치명적 한계가 존재했다.패트릭 해거티 사장은 열 안정성이 뛰어난 '실리콘(Silicon)'이야말로 전자 산업의 미래를 바꿀 물질임을 직관하고, 벨 연구소 출신의 화학자 고든 틸(Gordon Teal)을 영입하여 극비 연구에 착수했다. 1954년 5월, TI는 경쟁사들이 게르마늄 연구에 머물러 있을 때 세계 최초로 상업용 실리콘 트랜지스터 양산에 성공했다. 같은 해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탑재한 휴대용 소형 라디오(Regency TR-1)를 출시하며 진공관 시대를 종식시키고 ‘실리콘 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잭 킬비와 집적회로(IC) 발명>
실리콘 트랜지스터가 보급되자 엔지니어들은 더 복잡한 전자 기기를 만들기 위해 수천, 수만 개의 트랜지스터와 저항, 다이오드, 커패시터를 전선으로 일일이 납땜해 연결해야 했다. 부품 수가 늘어날수록 연결 부위의 결함과 단선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했다. 이를 전자공학계에서는 ‘수의 폭정(Tyranny of Numbers)’이라 불렀다.1958년 여름, TI에 갓 입사한 신입 연구원 잭 킬비(Jack Kilby)는 모든 동료가 집단 여름휴가를 떠난 댈러스 연구소에 홀로 남아 이 난제와 씨름했다. 킬비는 단일한 반도체 기판 위에 저항과 축전기, 트랜지스터를 모두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면 번거롭고 불안정한 납땜 연결선이 전혀 필요 없다는 혁신적인 발상을 도출했다.
잭 킬비는 게르마늄 조각 위에 모든 회로 부품을 일체형으로 집적한 가로 1.6mm, 세로 11mm 크기의 작은 칩을 동료 경영진 앞에서 시연했다. 스위치를 켜자 오실로스코프 화면에 완벽한 사인파 파형이 나타났다. 인류 최초의 집적회로(IC, Integrated Circuit)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비슷한 시기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 훗날 인텔 공동 창업자) 역시 실리콘 웨이퍼 평면 위에 금속 배선을 증착하는 '플레이너(Planar) 공정' 기반의 집적회로를 독자 발명했다.TI와 페어차일드는 치열한 특허 소송을 벌였으나, 양사는 이내 소송을 멈추고 기술을 상호 공유(크로스 라이선스)하는 대타협을 체결했다. 이 타협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소송 리스크 없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잭 킬비는 이 불멸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현대 정보화 사회를 개척한 거인으로 영원히 기록되었다.
<아날로그 반도체>
오늘날 TI는 연 매출의 75% 이상을 아날로그 반도체(Analog)에서, 약 20%를 임베디드 프로세서(Embedded Processing)에서 창출하는 고수익 초격차 전문 기업이다. 전 세계 10만 개 이상의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으며, 등록된 양산 제품 포트폴리오만 8만 개를 상회한다.아날로그 반도체는 디지털 반도체와 사업 문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미세공정 의존도의 차이다. 디지털 반도체(CPU, GPU, 메모리)는 3nm, 2nm 공정 미세화를 위해 수조 원의 EUV 노광장비를 쏟아부어야 하지만, 아날로그 반도체는 전압 내구성과 노이즈 차단이 핵심이므로 28nm~180nm의 레거시 성숙 공정에서 주로 제조된다. 둘째, 장기 수명 주기와 고마진 구조다. 제품 설계 주기가 1~3년에 불과한 스마트폰 AP나 메모리와 달리, 산업용 및 차량용 아날로그 칩은 한 번 채택되면 10년에서 길게는 20년 이상 동일한 칩이 장기 공급된다. 신규 연구개발비 지출이 줄어들며 시간이 갈수록 영업이익률이 40~50%를 상회하는 강력한 현금 창출원이 된다. 셋째, 엔지니어의 암묵지다. 아날로그 설계는 수식화된 자동 설계 소프트웨어(EDA)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회로 설계 장인들의 물리적 직관과 수십 년간 축적된 노하우(Design Art)가 필수적이다. 후발 주자가 거액의 자본을 투입해도 단기간에 모방하기 불가능한 진입 장벽을 형성한다.
TI의 가장 무서운 경쟁력은 제조 원가 구조에 있다. 경쟁사인 아날로그 디바이스(ADI)나 유럽의 인피니언(Infineon), NXP 등이 주로 200mm(8인치) 웨이퍼 라인을 활용하거나 파운드리에 외주 생산을 맡기는 반면, TI는 선제적으로 300mm(12인치) 아날로그 자체 팹(텍사스 셔먼, 리처드슨, 유타 레히 등)을 대규모로 구축했다. 300mm 웨이퍼는 200mm 웨이퍼 대비 다이(Die) 생산량이 2.3배 많으며, 패키징되지 않은 칩 기준 제조 원가를 약 40% 절감시킨다. TI는 이 원가 우위를 바탕으로 위기 국면마다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구사하여 경쟁사들을 압박하고 시장 점유율을 방어하는 ‘치킨게임의 지배자’ 역할을 수행한다.
<TI가 배출한 인물들>
TI는 단순한 칩 제조사를 넘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지탱하는 핵심 설계자들과 경영 거물들을 육성하고 공급한 ‘글로벌 반도체 사관학교’ 역할을 수행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는 모리스 창(Morris Chang, 張忠謀) 전 TSMC 회장이다. 그는 1958년부터 1983년까지 무려 25년간 TI에서 근무하며 글로벌 반도체 그룹 총괄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1987년 대만에서 세계 최초의 순수 파운드리 기업인 TSMC를 창업함으로써, 팹리스와 파운드리로 나뉘는 현대 반도체 분업 생태계 전체를 완성했다.
잭 킬비(Jack Kilby)도 TI에서 잔뼈가 굵은 인재이다.. 1958년 TI에 입사해 수석 연구원으로 재직한 그는 인류 최초로 집적회로(IC)를 발명했다. 이 독보적인 업적으로 200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현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정보화 사회의 문을 열었다.C.C. 웨이(C.C. Wei, 魏哲家) 현 TSMC 회장 겸 CEO 역시 TI 출신이다. 그는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TI의 R&D 조직에서 연구원(Member of Technical Staff)으로 재직하며 반도체 공정과 소자 기술의 기초를 다졌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TSMC의 초미세 나노 공정 양산 체제와 글로벌 생산 거점 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고든 틸(Gordon Teal)도 유명하다.TI의 초대 중앙연구소(CRL) 소장을 지낸 그는 1954년 세계 최초로 상업용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개발하여, 게르마늄에 머물러 있던 반도체 산업을 실리콘 시대로 전환시킨 물질적 토대를 확립했다.한국 반도체 산업의 태동을 이끈 한국계 엔지니어 군단도 대부분 TI 출신이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TI 댈러스 본사 및 R&D 센터에서 활약하던 한인 공정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할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당시 현대전자)의 초기 기술 고문 및 임원으로 대거 합류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최초의 64K D램 개발, 클린룸 설계, 노광 및 식각 공정 조건 셋업에 결정적인 노하우를 전수하여 K-반도체 신화의 주춧돌을 놓았다.
<모리스 창>
현대 반도체 분업 생태계의 최고 설계자인 모리스 창은 1958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엔지니어로 TI에 입사했다. 그는 약 25년간 근속하며 TI의 반도체 생산 라인을 진두지휘했고, 마침내 글로벌 반도체 부문을 총괄하는 수석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모리스 창은 TI에서 세 가지 반도체 경영 철학을 완성했다. 그 첫째가 학습 곡선(Learning Curve) 이론이다. 누적 생산량이 2배로 증가할 때마다 단위당 제조 원가는 일정 비율로 급격히 하락한다는 가격 선제 인하 전략을 현장에 철저히 적용했다. 철저한 0모리스 창의 수율(Yield) 관리도 TI에서 익힌 것이다. 미세 공정에서 발생하는 결함을 통계적으로 추적·제어하는 양산 기술의 본질을 체득했다. 고객 중심 비즈니스 마인드 역시 TI의 문화였다. 자체 칩을 설계하지 않고 고객사의 칩을 정직하게 위탁 생산만 해주는 ‘순수 파운드리(Pure-play Foundry)’ 모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5년 대만 정부의 초청을 받아 대만공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으로 부임한 모리스 창은 1987년 TSMC를 설립하며 전 세계 테크 산업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TSMC의 근간이 된 무자비한 수율 관리와 공격적인 선제 증설 투자는 모리스 창이 TI에서 축적한 경영 유산의 집대성이었다.모리스 창의 뒤를 이어 오늘날 TSMC의 단독 사령탑에 오른 C.C. 웨이 회장 역시 TI 연구원 시절 연마한 정밀 소자 물리학과 디바이스 신뢰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TSMC에서 7nm, 5nm, 3nm 및 2nm 공정을 차질 없이 양산 궤도에 올려놓는 기술적 추진력을 발휘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황무지 상태였던 대한민국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을 당시 결정적인 기술적 돌파구를 제공한 이들 역시 미국 TI 댈러스 본사에서 활약하던 한인 과학자·엔지니어들이었다. 이들이 전수한 클린룸 설계, 고순도 가스 배관, 노광·식각 공정 셋업 기술은 삼성이 1983년 64K D램을 독자 개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의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은 ‘AI 연산 속도’라는 화려한 간판 아래 진행되고 있으나, 그 이면에서 승패를 가르는 궁극적인 병목(Bottleneck)은 ‘전력 공급 효율화’와 ‘물리적 제어’에 있다.AI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막대한 전력을 기판 수준에서 나노초 단위로 분배하는 고효율 PMIC가 없다면 초거대 언어모델(LLM) 가속기는 열폭주로 멈춰 서게 된다. 수백 개의 모터와 센서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전기차, 자율주행차 역시 아날로그 반도체와 실시간 임베디드 프로세서의 절대적인 뒷받침 없이는 단 1cm도 안전하게 움직일 수 없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는 지난 70여 년 동안 집적회로 발명으로 반도체의 시초를 쏘아 올렸고, 실리콘밸리와 아시아 파운드리 생태계의 주역들을 길러냈으며, 반도체 산업의 모든 부침 속에서도 자신의 독보적인 영토인 아날로그 및 임베디드 영역을 굳건히 지켜냈다.화려한 테크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제조업의 본질인 생산 원가 우위(300mm Fab), 대체 불가능한 장인 기술(아날로그 회로 설계), 그리고 방대한 고객 포트폴리오(8만 종의 칩)를 구축한 TI의 생존 공식은 부침이 심한 글로벌 반도체 전쟁 속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과 기업들이 어떠한 기초 체력과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갖추어야 하는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