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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슬기로운 여름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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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여름나기 / 백승훈 시인
세상이 온통 사우나로 변한 듯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이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노랫말도 있긴 하지만 이 여름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지난달 백두산에서 세찬 바람에 손이 시리던 기억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틈틈이 지난달 다녀온 백두산 기행 소감을 정리하고 그곳에서 찍어온 꽃 사진들을 정리하는 중인데 폭염 때문인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밤이 되어도 열대야로 깊은 잠을 못 자다 보니 머리도 맑지 않고 생각도 잘 정리되지 않는다. 요즘은 하루 중 가장 온도가 낮은 시간대인 새벽, 산책하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가고 있다.
어제는 산책길에서 옥잠화를 보았다. 요즘 비비추는 아파트 화단이나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반해, 순백의 커다란 나팔 같은 꽃을 피우는 옥잠화는 오랜만이라서 내심 반가웠다. 책에도 쓴 적이 있는데 옥잠화는 내겐 아주 특별한 꽃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내가 군에 입대할 때까지 아침마다 머리를 곱게 빗어 쪽을 찌고는 비녀를 꽂으셨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서였을까. 어머니는 항상 값싼 비녀를 꽂고 계셨다. 그게 늘 마음에 걸려 제대하면 돈 벌어서 옥비녀를 사 드려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군에 다녀왔더니 어머니가 머리를 자르시는 바람에 옥비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옥잠화를 볼 때면 그리운 어머니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선녀가 실수로 떨어뜨린 옥비녀가 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옥잠화도 대표적인 여름꽃 중의 하나이지만 여름꽃의 대표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능소화라 할 수 있다. 옛날엔 ‘양반꽃’으로 불리며 지체 높은 양반집에서만 볼 수 있었다던 귀티 나는 꽃이 능소화다. 담장을 타고 오르거나 다른 나무둥치를 타고 올라 허공에 주황색 꽃등을 밝히는 모습을 보면 그리 매혹적일 수가 없다. 안도현 시인은 “능소화가 피면서/ 창가에 악기를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능소화란 이름이 ‘태양을 능멸하며 피는 꽃’이란 의미이고 보면 이 뜨거운 여름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 당당하고 멋스러운 모습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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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여름 정원의 여왕이라고 할 수 있는 수국도 여름꽃의 대표 주자로 손색이 없는 꽃이다. 몽실몽실 피어난 커다랗고 탐스러운 꽃송이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느 꽃이든 모여 필 때가 더 아름답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그중에도 수국은 더욱 그렇다. 어느 해인가, 대마도에 갔다가 해안 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수국 로드를 달려본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특히 수국은 토양의 산도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마법을 지닌 꽃이다. 산성이 강한 토양에선 푸른색, 알칼리성이 강하면 붉은색의 꽃을 피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름엔 꽃이 시든다고 생각하지만 여름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도 꿋꿋이 꽃대를 세우고 원색의 꽃을 피우는 백일홍도,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석 달 열흘을 꽃나무로 사는 배롱나무도 여름철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여름꽃이다. 사상 유례없는 폭염으로 세상이 가마솥처럼 끓어도 꽃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을 묵묵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채운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시간은 대부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힘든 시간을 지나고 되돌아보면 자신 있게 이겨냈다고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잘 견뎠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대부분이다. 성경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폭염의 여름도 지나갈 것이다. 더위를 탓하는 대신 어여쁜 꽃에 눈길을 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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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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