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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사나에노믹스와 공급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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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전 고려대 교수
일본 정치가 또다시 미증유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강경 우파적 행보와 '아베 신조의 진정한 후계자'를 자처하며 당당히 출범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체제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정권 퇴진 위기에 봉착하였다. 출범 초기 강력한 보수층의 결집과 '강한 일본'이라는 경제적 슬로건으로 모았던 기대감은 급격한 민심 이반이라는 거센 역풍에 직면하여 유린당하고 있다.
그 실패의 최전선에는 이른바 '사나에노믹스(Sanaenomics)'라 불리는 그녀의 경제 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세 자루 화살 즉 대규모 금융완화와 적극적 재정출동 그리고 성장을 계승 및 강화하여 국방·첨단 기술 분야에 국가 재정을 쏟아붓고 공급 능력을 극대화하겠다던 다카이치 총리의 공언은, 서민 삶을 짓눌러버린 초유의 '물가 폭등'과 '지지도 폭락'이라는 참담한 대가로 돌아왔다.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왜 통화 수단과 재정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공급경제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채 '돈풀기의 역설'에 갇혀버렸는가. 그 답은 어설픈 공급경제학에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경제 정책 구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공급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의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케인스주의식 수요 관리 정책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이라는 벽에 부딪히자, 등장한 것이 바로 공급경제학이다.아서 라퍼(Arthur Laffer)의 '라퍼 곡선'으로 대표되는 공급경제학의 핵심 본질은 명료하다. 시장의 수요를 인위적으로 자극하는 대신,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를 철폐하며 생산 주체인 기업의 의욕을 고취시킴으로써 경제 전체의 '총공급(Aggregate Supply)' 곡선을 우측으로 이동시키겠다는 것이다. 생산성이 극대화되면 공급량이 늘어나 성장률이 올라가는 동시에 물가는 오히려 안정된다는 이 아름다운 이론은 1980년대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레이거노믹스'로 결실을 맺었다.

공급경제학은 과세와 규제라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는 기업에게서 모래주머니를 제거해 주면, 생산 증가가 스스로의 수요를 창출하고 물가를 잡는다는 이른바 세이의 법칙(Say's Law)에 바탕을 둔다." 레이거노믹스의 실상은 장밋빛 환상과 달랐다. 세수 감축과 대규모 군사비 지출이 결합되면서 쌍둥이 적자(재정 적자·무역 적자)라는 불치병을 낳았고, 양극화를 극심하게 심화시켰다. 2010년대 일본의 아베 신조가 도입한 '아베노믹스' 역시 이 공급경제학적 틀에 초유의 '무제한 양적완화'를 결합한 극단적 변형이었다. 다카이치가 들고 나온 '사나에노믹스'는 이 공급경제학의 유산을 안보 및 첨단산업 주도형으로 변형하여 재소환한 것에 불과하다. 국가 안보 강화, 첨단 반도체 및 AI 산업 지원, 규제 완화를 통해 일본의 꺾인 공급 능력을 재구축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다카이치는 1980년대와 2020년대의 결정적 차이, 그리고 공급경제학 자체가 품고 있는 치명적 모순을 완전히 간과하였다.
공급경제학이 내세우는 가장 큰 명분은 "공급 능력이 늘어나면 물가가 낮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타난 것은 거꾸로 '물가 폭등'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카이치를 수렁으로 밀어 넣은 '돈풀기의 역설(Paradox of Money Printing)'이다.이 역설은 경제학적 '시차(Time Lag)'와 '통화 가치'의 메커니즘에서 발생한다. 정부가 첨단 기술이나 국방 공급 능력을 키우기 위해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고 통화 완화를 유지할 때, [재정 및 통화의 유출]은 즉각적으로 발생하여 외환시장과 상품시장에 작용한다. 반면, 그 돈을 받아 기업이 공장을 짓고 연구개발을 완료하여 실제로 [물건 생산(공급 능력 증가)]이라는 성과를 내기까지는 수년에서 수십 년의 긴 세월이 소요된다. 즉, 공급 능력이 실제 늘어나서 물가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발휘되기도 전에, 돈이 풀림으로써 발생하는 통화 가치 하락과 수요 자극이 물가를 먼저 폭등시키는 것이다.

다카이치 내각은 이미 GDP 대비 국가 부채가 250%를 넘어선 일본의 현실을 무시하고 "재정 지출을 더 확대하고 금리 인상은 자제해야 한다"는 신호를 시장에 지속적으로 방출하였다.그 결과는 참혹했다. 외환시장은 엔화 가치를 사정없이 내던졌고, 초엔저(超円安)가 유발한 수입 물가 폭등은 에너지, 식료품 등 생필품 가격을 집어삼켰다. 공급을 늘려 물가를 잡겠다는 사나에노믹스가, 도리어 공급 비용(원자재가)을 폭등시켜 서민의 일상을 파괴하는 '역설적 파국'을 낳은 것이다.다카이치 사나에의 지지율이 사상 최악으로 폭락한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스캔들 때문이 아니다.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고통이 한계치를 넘어섰기 때문이며, 이는 공급경제학이 가진 구조적 한계의 직관적 결과다.

첫째, '낙수효과(Trickle-down)'의 완전한 소멸이다. 공급 측면을 지원하여 기업이 버는 돈이 많아지면 그것이 임금 인상과 투자 확대로 이어져 서민에게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전제는 현대 글로벌 경제에서 완전히 깨졌다.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과 규제 완화로 이익을 얻었지만, 고물가 속에서 일반 서민과 중산층의 실질임금은 사상 최장기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서민의 장바구니는 비어 가는데 대기업과 자산가만 이득을 보는 구조는 민심을 격분시켰다.

둘째, 국가 부채와 재정 건전성의 덫이다. 수입 측면의 감세와 지출 측면의 대규모 재정 투입이 동시 이행되는 공급경제학은 언제나 막대한 재정 적자를 동반한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채무국인 일본에서 다카이치의 무모한 재정확대론은 일본 국채의 신용도를 흔들었고, 이는 국채 금리 상승 압력과 엔화 폭락이라는 이중의 재앙을 불렀다. 재정이 신뢰를 잃으면 통화 정책마저 마비된다는 진리를 다카이치는 무시하였다.
셋째, 수요 부진과 분배를 도외시한 자원 배분의 왜곡이다. 양극화가 심화된 상태에서 공급 능력만 늘린다고 해서 경제가 선순환하지 않는다. 대중의 소득과 구매력이 저하된 상황에서 특정 첨단 산업이나 안보 분야에만 재정을 쏟아붓는 것은, 경제 전체의 자원 배분을 왜곡시키고 대중적 소비 기반을 고사시킨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실패는 한 개인의 정치적 역량 부족을 넘어, 20세기형 공급경제학 패러다임을 21세기 복합 위기 시대에 무비판적으로 이식하려 했던 정책적 오만이 초래한 인재(人災)다. '돈을 풀어 공급 능력을 키우면 다 해결된다'는 신화는 초엔저와 고물가라는 현실의 벽 앞에 여장없이 깨져버렸다. 일본의 다카이치 진단은 한국 경제에도 엄중한 타산지석이 된다. 성장의 정체라는 위기 앞에서 '국가 주도의 대규모 재정 투입'과 '공급 측면의 규제 완화'라는 달콤한 구호에 빠져 민생과 재정 건전성, 통화 안정을 도외시한다면 그 끝은 언제나 '돈풀기의 역설'과 국민적 심판 뿐이다. 지금 다카이치는 위험하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잘못된 경제적 이념에 사로잡혀 핸들을 꺾지 않는 위정자의 무모한 고집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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