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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서양화가의 미술 에세이 ⑤ 소리를 볼 수 없는 사람들

영웅, Oil on canvas, 2200×12.000, 1988년. 한명호의 공식적 첫 개인전 작품이다.이미지 확대보기
영웅, Oil on canvas, 2200×12.000, 1988년. 한명호의 공식적 첫 개인전 작품이다.
아주 먼 옛날, 인간은 우주 곳곳에 흩어져 살던 참으로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만물의 최소 단위인 원자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모든 전자는 결국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 똑같은 전자들이 모여 어떤 것은 단단한 돌이 되고, 어떤 것은 푸른 지구가 되며, 어떤 것은 숨을 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때 인간은 그 만물의 이치를 주무르며 스스로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문자 그대로 신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우주가 팽창하며 내는 아득한 소리들 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것들을 가두어둘 줄도 알았고, 언제든 그 가둬둔 소리를 꺼내어 눈으로 읽어낼 수도 있었습니다. 빛과 소리가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뻗어 나가는 그 거대한 우주의 화폭 속에서, 돌이 속삭이는 소리와 철이 부딪히는 소리, 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가만히 들여다볼 줄 알았습니다.

경이로운 힘은 자체로 교만입니다. 전자를 흉내낸다고 해서 존재의 심장인 핵(核)을 가질 수는 없는 법. 전자의 배열로 창조가 이뤼지지 않는 것이고 연금술로, 전자만으로 납을 순금으로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중첩된 우주 속에는 창조되어질 것들의 순서가 있고 순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교만이며 교만에 대해서는. 항상 가혹한 징벌이 따릅니다.
소리를 보는 눈은 멀었고 만물의 이야기를 듣는 귀는 닫혔습니다. 신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육체에 갇혔습니다. 지성과 감성, IQ와 EQ가 어지럽게 교차하는 좁은 틈바구니에서 이성은 과학이라는 문명을 쌓고 감성은 문화라는 허영의 탑을 세웁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미증유의 영성에 기대어 종교를 만들고 이 위태로운 지구에 겨우 버티고 서 있게 되었습니다.

23.5도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축이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거만한 문명은 펄펄 끓는 철과 니켈의 마그마 속으로 허무하게 녹아내렸고 전자들은 다시 정렬하여 새로운 사물과 생명을 빚어 냅니다. 주기율표 위의 모든 원소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원소들이 얽히고설켜 우리는 또다시 진화하고, 언젠가 또다시 저 뜨거운 마그마 속으로 속절없이 녹아들어 가는 윤회와 숙명이라는 회전문을 밀고 있습니다.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 초록의 깊이를 더한 화면 위에  바람대신 소리를 그리다. 소리는 기도이고 주문이고 그 공간에 영원히 머물기도하고 계속 확장되기도 한다.이미지 확대보기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 초록의 깊이를 더한 화면 위에 바람대신 소리를 그리다. 소리는 기도이고 주문이고 그 공간에 영원히 머물기도하고 계속 확장되기도 한다.
Oriental ink.on, paper, 2026.이미지 확대보기
Oriental ink.on, paper, 2026.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 숲속의 소란함은 나무와 풀과 꽃의 형상이 아니다.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은 인간이 상실한 영역이나 그들의 소리를 보는 것은 그리는 자의 몫이다.이미지 확대보기
소리를 보다, Oil on canvas, 2026. 숲속의 소란함은 나무와 풀과 꽃의 형상이 아니다.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은 인간이 상실한 영역이나 그들의 소리를 보는 것은 그리는 자의 몫이다.

지금 우주의 비밀인 핵을 거머쥔 자들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주를 가득 채운 수소를 연료로 태우고, 조물주가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우주의 법칙을 수학과 알고리즘으로 완수해내는 이들. 납으로 금을 연성하고, 화성으로 인류를 이주시키며, 달에서 자원을 캐어 쓰는 새로운 인류가 도처에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성별을 타고났으나 마치 홍학처럼 남녀의 구분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낡은 종교의 교리를 뛰어넘어, 인류가 새롭게 숭배할 거대한 기술의 신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막연한 사후 세계를 좇거나 구시대의 권력에 질질 끌려가던 우매한 대중들은, 이제 영생과 불멸이라는 기술의 유혹 앞에 자신의 영혼을 통째로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초인공지능(ASI)이 쏟아내는 경천동지할 청사진들. 유전자를 복제하고 인공 장기를 갈아 끼우며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해주겠다는 이 새로운 창조주들 앞에서 나는 얼마나 더 무기력해질까요.

기술 권력자들은 과거의 졸부들과는 다릅니다. 명품을 걸치고 향락에 빠지던 구시대의 부자가 아니라, 좁은 단칸방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코드를 짜는 묵언의 수도자와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모든 가치관을 전복시키려는 혁명가이자, 신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 사탄의 대리인처럼 서늘하게 번뜩입니다.

그들은 낡은 경전의 교리나 강압적인 채찍질로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애롭고 합리적인 얼굴로 새로운 구원을 약속합니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거나 제단을 쌓지 않아도, 압도적인 정보와 AI의 연산 능력이 질병을 몰아내고 무한한 생산성을 안겨줄 것이라 속삭입니다. 의사가 사라져 의료비의 공포는 잊히고 국가는 부강해지며, 모두가 안락한 낙원을 누리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 우리 모두가 그 달콤한 낙원에 닿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저 거대한 바벨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새로운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는 표를 구하지 못해 쓸쓸히 소멸해 가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온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페이스북의 다정한 안부와 구글의 편리한 검색창의 활용은 어쩌면 그들이 꿈꾸는 신세계를 짓기 위한 유력한 거름이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매일 늙어가고 소멸하는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기술로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한들,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정교한 지옥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지구의 축은 여전히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갈비뼈로 빚어진 여인네처럼 굳건하던 지구 중심의 단단함은 어디로 가고, 흙으로 빚어진 사내들의 육신처럼 우리의 영혼은 이토록 흐물흐물 부서져 가고 있는 것일까요. 저 아득한 우주에서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낯선 원소들만이, 깊은 밤 텅 빈 캔버스 위로 소리 없이 부서져 내릴 뿐입니다.

한명호(서양화가)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서양화가)

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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