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으로 읽는 21세기 도덕경' 제41장

그러므로 노자는 도의 진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말이 있으니 밝다고 하는 도는 어슴푸레한 것이고, 나아가는 듯 물러나는 것 같으며, 색깔이 없는 도는 최상의 골짜기 같고, 진실로 깨끗한 것은 무덤덤하다. 넓고 큰 덕은 모자란 듯하고, 덕을 행함은 가볍고 경박한 것 같다. 그리고 본연 그대로 진실한 것은 맑은 물이 흐린 듯하다고 하였다.
도는 밝은 듯 흐리다고 한 까닭은 빛이 섞인 희미한 어둠을 뜻한다. 명상으로 삼매에 들었을 때의 형용이기도 하다. 나아가는 듯도 하고 물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은 카오스가 일어나기 전에 도의 현묘한 움직임의 표현이다. 움직임이 있는 듯 없는 듯하여 모양도 색깔도 없다는 것은, 초연한 도의 모습 없는 형상과 고요함의 형용이다.
다음 구절, ’진실한 덕은 골짜기 같다‘는 뜻은 바라는 바 없이 덕을 베푸는 도의 쓰임이다. 골짜기 물이 흘러서 대지를 적셔 뭍 생명을 낳고 길러주듯 만물을 낳고 길러주는 곡신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진실로 가장 깨끗한 것은 아무런 느낌이 없이 무덤덤하다는 뜻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서 선악을 차별할 수 없는 진실한 도의 형용이다. 그것이 바로 중용이다.
노자는 중용을 음식 맛으로도 비유하였다. 맛으로 음식을 차별하는 것은, 혀를 썩게 한다고 하였다. 차별하지 않는 음식 맛이란 부드러운 음식이든 거친 음식이든 무덤덤하게 먹는 것을 이른다. 차별이 없는 중용에 대하여 노자는 모서리가 없는 대우주를 예로 들었다.
큰 방위(天)는 모서리가 없고(大方無隅) 큰 그릇(宇宙)은 시간이 끝이 없듯 아득히 펼쳐져 있지만 충실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 큰소리는 고요하고 대도는 모양이 없다. 그리고 도는 은밀하여 이름이 없고 이름이 없어도 잘 베풀어주고 잘 이루어지게 한다고 하였다. 큰 방위는 아득한 대우주를 뜻한다. 대우주는 모서리가 없이 아득하므로 원(圓)이라 형용한다.
대기만성을 일반적으로 큰 인물은 늦게 이루어진다고들 해석한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 사대성인이라는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는 30세에 대각을 얻어 크다기보다 위대한 인물이 되었고, 공자 소크라테스는 50대 젊은 나이에 뜻을 이루었다. 소위 영웅이란 큰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징기스칸은 40대에 동양은 물론 유럽까지 지배하였고 알렉산드는 20대에, 한국의 광개토대왕 역시 20대에 동아시아 대부분과 러시아 일부에다 틔르키에까지 정복하였다. 모두 늦게 뜻을 이룬 큰 인물은 없었다.
대기는 대우주를 뜻하고, 만성은 아득한 대우주가 비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체 존재를 빠짐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즉 대우주를 큰 그릇에 비유하고 이루어지다는 뜻의 성(成)은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늦다는 뜻의 만(晩)의 본래 의미는 시간의 끝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 장의 줄거리인 중용과 모든 구절이 막힘없이 이어진다.
끝 구절 큰 소리는 고요하다는 것은, 우주의 소리를 의미한다. 하늘은 오른쪽으로 돌고, 지구는 왼쪽으로 돈다. 지구가 도는 소리가 엄청나지만, 청각을 초월하므로 들을 수 없거니와 대우주의 에너지가 도는 소리는 더더욱 들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소리를 옴(OM)이라 하기도 하지만 실제 소리의 표현이 아니라 일종의 주문이다. 그만큼 우주의 소리는 희귀한 것이다. 이처럼 대우주와 도의 작용은 모양도 없고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이 은밀한 것이다. 하지만 만물을 낳고 기르는 덕을 그치지 않는다.

정경대 한국의명학회 회장(종교·역사·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