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가격·물량 공세에 '배워야 산다' 위기론…과잉공급이 남긴 산업 후유증
N·제네시스 넘어 로보틱스까지 경쟁축 이동…정의선式 '다른 룰' 시험대
N·제네시스 넘어 로보틱스까지 경쟁축 이동…정의선式 '다른 룰' 시험대
이미지 확대보기중국 자동차업체들이 가격과 공급망, 빠른 개발속도를 앞세워 세계 시장을 흔들면서 국내에서도 "중국을 배워야 한다", "중국을 두려워해야 한다", "현대차·기아도 중국 업체의 가격 경쟁력을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질 수 있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중국 산업이 지나온 궤적을 보면 오히려 반대의 질문이 필요하다. 대규모 생산능력을 앞세워 가격을 낮추고 경쟁사를 치킨게임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자동차 산업이 따라가야 할 미래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이 가야 할 길도 중국 업체가 만든 가격경쟁의 규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상품, 브랜드를 통해 자신만의 경쟁 기준을 계속 만들어내는 쪽에 가깝다.
3일 산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태양광과 디스플레이, 배터리, 전기차 등에서 거대한 내수시장과 공급망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빠르게 키웠다. 낮은 가격과 대량생산은 단기간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강력한 무기가 됐지만 공급이 수요를 넘어선 뒤에는 업체끼리 가격을 더 낮추는 경쟁이 반복됐다.
시장이 커져도 기업이 충분한 이익을 남기지 못하면 다음 기술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든다. 산업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했던 낮은 가격이 결국 산업 전체의 수익성을 떨어뜨리고 추가적인 가격 인하 없이는 판매를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드는 역설이다.
가격으로 장악한 시장이 남긴 것
태양광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은 압도적인 생산능력을 구축했지만 과잉공급과 가격하락이 장기화하면서 제조사들의 수익성 악화가 이어졌다. 태양광 발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제조산업에서는 생산을 늘릴수록 가격이 떨어지는 구조가 굳어졌다. 시장점유율 확대와 건강한 산업 생태계가 반드시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액정표시장치(LCD) 시장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중국 업체들의 대규모 증설로 범용 LCD가 가격 중심의 시장으로 빠르게 변하자 국내 업체들은 같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드는 경쟁에서 벗어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고부가 제품으로 중심축을 이동했다.
최근 자동차용 디스플레이에서는 다시 제품의 질이 중요해지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차량 내부 화면이 단순히 정보를 보여주는 부품을 넘어 디자인과 사용자경험, 차량의 고급감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면서 고급차를 중심으로 OLED 등 고부가 디스플레이 적용이 확대되고 있다. 값싼 대형 화면을 많이 넣는 것만으로는 고급차 소비자를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에서는 이 같은 차이가 더욱 극명하다. 범용 D램 가격만 놓고 경쟁하는 대신 국내 기업들은 당장 시장성이 불확실했던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장기간 투자했고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기술 선점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같은 제품을 싸게 만드는 것보다 상대가 당장 따라오기 어려운 다음 시장으로 먼저 움직인 결과다.
한국 산업이 중국의 물량공세를 겪으며 얻은 교훈도 여기에 있다. 같은 시장에서 끝까지 가격으로 맞붙어 이기는 것보다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경쟁의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강한 생존전략이 될 수 있다. 참고한 원자료 역시 중국의 가격 치킨게임을 받아들이기보다 기술격차를 통해 다른 시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논리를 중심에 두고 있다.
전기차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중국 업체들은 가격 인하를 반복하며 전기차 보급 속도를 높였지만 전기차는 단순 전자제품보다 안전성과 내구성, 배터리 관리, 주행성능, 소프트웨어, 서비스망까지 함께 평가받는 제품이다.
이미지 확대보기특히 배터리는 가격만으로 선택할 수 없다. 전기차에서 가장 비싼 부품인 동시에 열관리와 수명, 충돌안전, 품질관리 능력이 차량 전체의 가치를 좌우한다. 원가를 낮추는 것이 필요하더라도 안전과 성능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가격까지 낮출 수 있어야 진짜 경쟁력이 된다.
중국을 따라갔다 실패한 선택도 존재
현대차그룹이 이런 판단을 언제나 옳게 해온 것은 아니다. 일부 모델에서는 장기적인 상품성보다 원가와 수익성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 것으로 읽힐 선택도 있었다.
기아가 일부 전기차에 중국산 배터리를 적용했을 때 시장에서 비판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산 배터리를 사용해 원가를 낮추는 선택 자체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소비자가 이를 감수할 만큼 뚜렷한 가격 경쟁력이나 상품상의 이점을 함께 얻었느냐다.
더 낮은 원가의 부품을 사용하면서 판매가격에서는 소비자가 체감할 만한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면 기업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상품성을 타협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가격을 낮춰 새로운 시장을 만들지도 못하고 고급 상품으로서의 차별성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느 쪽에서도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다.
실제로 국내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는 중국 생산기지와 배터리 공급망을 활용하면서 가격을 크게 낮춘 모델을 투입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한 경험이 있다. 기아가 원가절감을 선택하면서도 테슬라만큼 공격적인 소비자가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중국식 원가경쟁을 선택하고도 그 장점은 살리지 못한 셈이다.
현대차그룹의 큰 방향이 맞다고 평가하는 것과 이런 개별 의사결정을 비판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가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중국식 원가절감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중국 업체나 테슬라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낮은 가격으로 싸울 것이라면 압도적으로 싸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소비자가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그 중간에 어정쩡하게 머물 때 시장을 잃는다.
가성비에서 N·제네시스로…현대차가 바꾼 자리
현대차그룹 전체가 지난 20여년간 걸어온 길은 오히려 후자에 가까웠다. 과거 현대차와 기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경쟁사보다 낮은 가격에 많은 사양을 제공하는 가격 대비 상품성이었다.
하지만 품질과 디자인, 내구성, 주행성능을 끌어올리면서 저가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벗었고 이제는 토요타와 폭스바겐을 비롯한 글로벌 대중 브랜드와 같은 시장에서 경쟁한다. 중국 업체의 가격에 맞춰 과거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게 넘어온 시장의 벽을 스스로 다시 내려가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자동차 시장에서는 이 벽을 넘기가 특히 어렵다. 비싼 소재를 쓰고 성능 좋은 자동차 한 대를 만든다고 소비자가 그 브랜드에 곧바로 두 배의 가격을 지불하지 않는다. 과거 어떤 자동차를 만들어왔고 어떤 기술을 축적했는지, 소비자가 해당 브랜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함께 가격을 결정한다. 원자료에서도 폭스바겐 페이톤 사례를 통해 제품 하나의 완성도만으로 기존 브랜드가 가진 시장의 벽을 넘기 어렵다는 점을 짚고 있다.
현대차가 고성능 N을 키워온 것은 이 같은 브랜드의 벽을 허문 대표적인 사례다. N은 단순히 출력이 높은 차량 몇 대를 만든 프로젝트가 아니다. 현대차에 부족했던 운전 재미와 고성능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모터스포츠에서 차체와 섀시, 제동, 열관리, 구동제어 기술을 축적했다.
그 기술은 다시 일반 양산차로 내려왔다. 최근 아반떼를 비롯한 현대차의 주행 안정성과 차체 완성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진 것도 고성능 기술 축적과 별개로 보기 어렵다. 가격표에 표시되지 않는 차량의 기본기가 브랜드의 값을 높이는 기반이 된 것이다.
제네시스는 그보다 더 높은 벽을 넘는 작업이다. 현대차와 기아가 대중차 시장에 자리잡은 뒤 제네시스를 별도의 럭셔리 브랜드로 분리하면서 현대차그룹이 판매할 수 있는 자동차의 가격 천장 자체가 달라졌다.
제네시스가 의미 있는 이유는 비싼 차를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다. 현대차그룹이 과거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고객층에서 독립된 브랜드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디자인과 소재, 승차감, 서비스 경험을 축적하며 '현대차가 만든 비싼 차'가 아니라 하나의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저가에서 대중차로, 다시 N을 통해 고성능으로, 제네시스를 통해 럭셔리로 자신들이 경쟁할 수 있는 시장을 단계적으로 넓혀왔다. 원자료에서 강조하는 '시장과 소비자의 분리'도 결국 이런 과정의 결과다. 경쟁사가 가격을 낮출 때마다 따라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 다른 소비자와 다른 시장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정의선의 집요한 혁신…다음 룰은 로보틱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있다. 정 회장의 경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이미 잘하는 사업에서 조금 더 많은 이익을 내는 데 머물지 않고 현대차그룹에 없었던 영역을 하나씩 만들어왔다는 점이다.
이미지 확대보기당장 판매량만 놓고 보면 규모가 크지 않은 N을 장기간 키웠고, 성공 여부를 쉽게 장담하기 어려웠던 제네시스의 독립 브랜드화도 지속했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수소 등 여러 동력원을 함께 준비하면서 특정 기술 하나에 모든 미래를 걸지도 않았다.
정 회장의 혁신은 자동차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보스턴다이내믹스를 품고 로보틱스와 인공지능(AI), 스마트팩토리, 피지컬 AI까지 기술의 범위를 넓혔다. 아직 본격적인 시장이 열리지 않은 단계에서 먼저 자본을 투입하고 현대차그룹의 제조현장을 거대한 실증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N과 제네시스가 지난 10년 동안 현대차그룹의 자동차와 브랜드에 새로운 값을 붙였다면 로보틱스와 피지컬 AI는 다음 10년의 기술격차를 미리 확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경쟁사가 시장성이 확인된 뒤 뛰어들 때 이미 기술과 데이터, 산업 적용 경험까지 축적해놓겠다는 것이다.
이런 집요함은 현대차그룹을 과거 다른 자동차회사가 만든 흐름을 따라가던 위치에서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는 쪽으로 옮겨놓았다. 고성능 전기차와 전용 전기차 플랫폼, 독립 럭셔리 브랜드, 수소와 로보틱스 등을 동시에 밀어붙이는 업체는 많지 않다.
현대차그룹의 모든 선택이 옳았다고 평가할 필요도 없다. 앞서 기아의 일부 전기차처럼 원가와 수익성을 우선했다가 상품과 가격 어느 쪽에서도 시장을 설득하지 못한 선택은 명확히 비판받아야 한다. SDV와 자율주행처럼 여전히 경쟁사를 추격해야 할 분야도 있다.
하지만 개별 모델과 기술의 시행착오를 그룹 전체의 방향과 혼동할 필요도 없다. 지난 10여년의 큰 흐름은 현대차그룹이 중국의 가격을 따라가기보다 자동차의 성능과 브랜드, 기술을 한 단계씩 위로 끌어올리는 과정이었다.
중국에서 배울 것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중국의 빠른 제품개발과 부품 공급망, 소비자 반응을 제품에 반영하는 속도는 현대차그룹 역시 활용해야 할 경쟁력이다. 현대차그룹이 중국을 기술과 상품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중국의 개발속도를 배우는 것과 중국의 가격 치킨게임을 배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중국에서 좋은 기술과 공급망을 흡수하는 것과 글로벌 시장 전체를 중국 업체가 만든 저가 경쟁의 규칙에 맞추는 것도 전혀 다르다.
현대차그룹이 중국 업체와 가격으로 정면승부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이미 대중차와 고성능, 럭셔리 시장의 벽을 어렵게 넘어온 현대차그룹이 중국 업체의 가격에 맞춰 상품을 낮추기 시작한다면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한국 산업은 범용 LCD 가격경쟁에서 OLED로 이동했고 범용 메모리를 넘어 HBM이라는 더 높은 시장을 만들어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상대보다 싸게 팔기 위해 끝없이 가격을 낮춘 것이 아니라 상대가 따라와야 할 다음 기술을 먼저 만들었다.
현대차그룹도 같은 시험대에 서 있다. 중국 업체의 가격을 보고 흔들릴 것이 아니라 N에서 확보한 고성능 기술을 양산차로 확산하고 제네시스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하이브리드와 전동화,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자율주행, 로보틱스에서 계속 다음 격차를 만들어야 한다.
중국을 두려워해 중국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순간 경쟁의 주도권도 중국이 만든 규칙으로 넘어간다. 반대로 기술과 상품, 브랜드의 기준을 계속 높인다면 경쟁자는 현대차그룹이 만든 기준을 따라와야 한다.
현대차그룹이 모든 선택을 잘해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잘못된 선택은 버리고 잘해온 방향은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얘기다. 중국보다 싸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경쟁업체가 따라와야 할 기술과 상품, 브랜드의 기준을 만드는 회사. 정의선 체제 현대차그룹이 지금까지 걸어온 큰 방향은 오히려 그쪽에 더 가깝다.**
김태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ghost427@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