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이 중국발(發) 공급 과잉과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로 휘청이고 있다. 에틸렌 등 범용 제품 비중이 높은 일부 업체들은 원가 절감 등을 위해 공장을 멈춰 세우고 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정부가 "위기를 강 건너 불 보듯 보고 있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이들은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이륙하는 데 일조한 화학산업을 살리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4일 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최근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1~3공장 가운데 2공장 가동 중단 절차에 들어갔다. 생산 시설을 비우고 질소를 충전하는 이른바 박스업(Box-Up)으로 가동을 정지한 상태에서 설비를 보호하는 조치다. 가동이 중단된 곳은 에틸렌글리콜(EG), 산화에틸렌유도체(EOA) 생산 라인이다. 2공장 내 생산 제품 라인이 멈춘 것은 상반기 페드(PET)에 이어 두 번째다.
LG화학은 생산을 중단하거나 비주력 사업 매각에 나서고 있다. LG화학은 올해 3월 석유화학 원료로 쓰이는 스티렌 모노머(SM)를 생산하는 여수SM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SM은 가전에 들어가는 합성수지·합성고무 등에 쓰이는 원료다. 또 지난해 IT 소재 사업부의 필름 사업 중 편광판과 편광판 소재 사업을 중국 기업에 매각하기도 했다. 나프타분해시설(NCC)이 없는 업체들도 상황이 어렵다.
국내 업체들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석유화학 업황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은 국내 업체가 수출한 석유화학 제품을 중국이 수입·재가공해 세계 각지로 수출하는 구조다. 하지만 중국의 석유화학 자급률이 높아지고 생산량이 증가하자 이런 구조가 무너졌다. 우리나라 제품을 가장 많이 찾았던 중국이 더는 한국산 제품을 찾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도 겹쳤다.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줄어든 상황인 것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런 불황이 언제 회복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에 더해 중동발 공급 과잉이 예고되고 있고, 경기 회복 시점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업계 한 관계자는 "직접적 원인은 중국발 공급 과잉과 경기 침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정부에서 연구개발(R&D) 지원이나 사업 재편 지원을 하더라도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며 "중국, 중동 증설을 정부가 해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산업 전반적인 문제"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화학산업이 우리나라 경제에 기여한 바가 큰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현재 정부는 석유화학 업계가 원하는 안을 주면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입장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경제는 50년 이상 화학산업에 의존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10~15년 사이에 정부는 화학산업에 대한 신뢰를 모두 무너뜨렸다"며 "우리를 잘살게 만들어준 산업을 토사구팽(兔死狗烹)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발 공급 과잉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산업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다.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등의 개정을 통해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화관법은 화학물질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유해화학물질의 취급 기준을 강화하는 법률을 말한다. 화평법은 화학물질과 이를 함유한 제품을 관리하는 법률이다.
이 교수는 "가장 시급한 것은 일명 화학산업 퇴치법으로 불리는 화관법, 화평법 등의 개정"이라며 "제도적 걸림돌을 해결해야 하고, 여기에 연구개발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정희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h132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