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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트럼프 관세폭탄… 대공황 "스무트-홀리법의 교훈"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캐나다 및 멕시코에 25%, 중국에 추가로 10%의 보편적 관세를 각각 부과키로 최종적으로 결정했다.통상은 물론 비(非)무역이슈에서도 관세로 상대를 위협하는 '관세 무기화' 정책을 사실상 공약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재집권 이후 실제로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처음이다.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에까지 예외없이 전면적인 관세를 부과하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면서 글로벌 통상 질서에 상당한 충격이 예상된다.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국가에 대한 보편 관세를 공약했으며 반도체, 철강 등에 대한 부문별 관세도 예고했다는 점에서다.여기에 맞서 다른 국가들도 맞대응 조치에 나설 경우 트럼프발(發) 관세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통상 국가인 한국의 수출 전선에도 비상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이른바 관세전쟁의 신호탄이다.

미국 서부 지역을 돌다 보면 후버댐을 만나게 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콜로라도 남부로 흘러가는 콜로라도강 중류에 우뚝 선 미국 최대의 댐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의 경계에 걸쳐 있다. 그랜드캐니언의 하류이기도 하다.
후버댐은 미국을 넘어 세계 인류사에 기록될 만한 거대한 토목 사업의 산물이다. 1931년에 착공돼 1936년까지 6년 공사 끝에 완공됐다. 후버댐은 최근까지만 해도 세계 최대 댐이었다. 지금은 규모 면에서 중국 싼샤댐 등에 뒤지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압도적 1위다. 후버댐을 짓는 데 660만t의 콘크리트가 쓰였다. 미국 횡단 고속도로를 놓을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이다.

후버댐은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50㎞ 정도 떨어진 블랙 협곡에 우뚝 서 있다. 후버댐을 건설하면서 미국 최대의 인공 호수이자 유명 휴양지인 미드 호수(Lake Mead)가 생겨났다. 길이 184㎞, 최대 폭 16㎞, 둘레 880㎞, 수심 150m인 미드 호수는 미국 서부의 대표적인 국립 레크리에이션 휴양지다. 후버댐에는 모두 17개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연간 4억㎾의 전기를 생산한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는 바로 후버댐이 만들어낸 전기로 살아가고 있다.

콜로라도강은 전력 개발, 관개, 홍수 조절, 레크리에이션, 운항 등 강물의 다목적 사용이라는 개념이 시도된 첫 사례다. 1922년 콜로라도강 유역에 포함된 미국의 7개 주, 즉 애리조나·네바다·캘리포니아·와이오밍·유타·콜로라도·뉴멕시코가 합동으로 '콜로라도강 개발 협정'을 맺은 것이다. 콜로라도강의 체계적인 개발과 관리, 물 사용량 배분 등에 관한 기본 골격이 이때 마련됐다. 후버댐 건설은 이 협정의 산물이다. 1928년 미국 상·하원 의회가 '볼더 협곡 계획법(Boulder Canyon Project Act)'을 통과시켰다.
후버댐은 처음부터 이름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볼더 협곡 계획법을 주도한 이가 당시 미국 상무부 장관이던 허버트 후버였다. 후버는 1929년 31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댐 건설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댐의 원래 이름은 볼더댐(Boulder Dam)이었지만, 대통령 후버는 자신의 업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댐에 붙였다. 그 이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댐 건설을 위한 입법 조치는 마무리됐지만 착공은 계속 늦어졌다. 그즈음 경제 대공황이 터지면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뉴욕증시가 무너진 것이 1929년 10월 24일이었다. 뉴욕증시 폭락으로 기업들은 자금난에 빠졌다. 기업 불황은 정부의 세수 부족으로 이어졌다.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도 댐 건설에 돈을 융통할 여력이 없었다.

후버 대통령 시절 미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댐을 건설할 상황이 못 되었다. 후버는 결국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패배해 물러났다. 후버댐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물은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전 정권이 망친 경제를 되살리겠다며 뉴딜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대규모 일자리 창출을 통한 토목·건설 사업이 뉴딜의 핵심이다. 여기에는 후버댐 건설이 포함돼 있었다. 후버댐 사업은 뉴딜 정책 이전에 치수 및 전력 생산 용도로 이미 시작됐지만 대공황으로 미적거리다가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추진하면서 전임 후버 대통령이 명명했던 후버댐의 이름을 볼더댐으로 바꿔버렸다. 이 댐은 1936년 완공됐다. 완공 당시 정식 이름이 볼더댐이었다. 그러다가 루스벨트 사후 그를 이은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 이 댐의 이름을 다시 후버댐으로 되돌리면서 오늘날 후버댐으로 이어져왔다. 1985년 미국 정부는 후버댐을 '내셔널 히스토릭 랜드마크'로 지정했다.

후버댐 건설 논의가 한창이었던 1929년 10월 24일 잘나가던 뉴욕증시가 이유도 없이 흔들렸다. 아침 9시 30분 증권거래소 문을 열자마자 주식을 내다 팔겠다는 매도 주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 바람에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공황의 시작이었다. 이날이 마침 목요일이었기에 뉴욕증시는 '암흑의 목요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공화당 소속의 의회 의원이었던 스무트와 홀리는 미국 경제가 갑자기 어려워진 이유를 해외로부터의 수입 급증에서 찾았다. 높은 관세를 부과해 수입을 막으면 미국 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전 세계 경제정책 역사상 최악으로 불리는 그 유명한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이다.
후버 대통령은 끝내 2만여 개 품목의 관세율을 평균 59%, 최고 400%로 인상해 버렸다. 처음 법안이 통과될 때 많은 사람이 불황 탈출의 기대에 부풀었다. 실제로 내수 기업의 매출이 오르는 반짝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절망으로 바뀌었다. 수입 가격이 전보다 두 배 이상 오르자 미국이 인플레이션 함정에 빠졌다. 유럽 국가들은 자국 물건이 팔리지 않자 서둘러 미국에 대한 '보복 관세' 법안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일반 관세법을 만들어 모든 수입품에 대해 32% 관세를 매겼다. 프랑스·독일·캐나다 등 20여 개국이 미국에 '보복 관세'를 선언하고 나섰다. 전 세계 '무역 전쟁'이었다. 그 결과 미국의 수출액은 기존 52억 달러에서 21억 달러로 대폭 줄어들고 말았다. 면화나 담배 등의 수출이 급격히 감소했다. 후버의 정치 기반이었던 농민들이 특히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자기 나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매긴 것이 오히려 미국산 물건 수출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많은 수출기업이 돈을 벌지 못해 공장 문을 닫아야만 했다. 유럽도 미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공장들이 도산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가족을 이끌고 거리를 전전하며 끼니를 걸러야 했다. 거리는 구걸하는 사람들로 넘쳤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경제 대공황이라고 하면 1929년의 주가 대폭락 사태부터 떠올린다. 그러나 주가 대폭락이 곧 공황은 아니다. 주가는 그 속성상 한꺼번에 많이 떨어지면 저가 매수세가 몰려 다시 오를 수도 있다. 실제로 주가 급락 사태 이후 서너 달 만에 경기 회복의 신호가 감지됐다. 1930년 초에 들어 다우지수와 소비지표는 완만하나마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주가 하락 때문에 대공황이 온 것이 아니라 주가 하락의 원인을 잘못 진단한 후버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대공황을 야기한 것이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대공황의 원인을 후버 대통령이 추진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공공사업을 늘려서라도 공급 과잉과 수요 부족을 해소하자는 이른바 유효수요 확대 정책을 권고하고 나섰다. 루스벨트는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뉴딜 정책을 폈다. 그 뉴딜의 양대 축이 바로 테네시강 TVA 개발 공사와 후버댐 건설이었던 것이다. 후버댐에는 무리한 관세법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이 스무트-홀리 관세법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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