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말레이시아·일본 실사 강화…네오클라우드 대거 제외
이미지 확대보기엔비디아가 중국으로의 AI칩 우회 유입을 막기 위해 아시아 고객 심사를 대폭 강화했다. 새로 만든 구매 승인 명단에서 기존 아시아 고객의 절반 이상이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엔비디아가 강화된 규정 준수 심사를 통과한 기업만 AI칩을 살 수 있도록 새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었다고 1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화이트리스트는 일정 기준을 통과한 기업만 거래 대상으로 인정하는 승인 명단을 뜻한다.
엔비디아는 최근 몇 달 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일본에서 고객 실사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구매 고객의 절반 이상이 일단 제외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초기 심사에서 탈락한 기업도 내부 절차를 바꾸거나 추가 요건을 충족하면 재신청할 수 있다.
이번 조치는 미국 정부가 대중국 AI칩 수출통제의 허점을 막는 흐름과 맞물려 있다. 중국 기업들이 제3국 법인이나 중개업체를 통해 엔비디아 첨단 AI칩을 확보해왔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엔비디아가 고객 확인 절차를 한층 까다롭게 만든 것이다.
◇네오클라우드 업체 대거 영향
이번 심사 강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은 이른바 네오클라우드 업체들이다.
네오클라우드는 AI 연산에 특화된 클라우드 인프라를 제공하는 신생 또는 전문 클라우드 사업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와 서버를 대규모로 확보해 AI 모델 학습과 추론 서비스를 제공한다.
AI 붐이 확산하면서 네오클라우드 업체들은 고성능 GPU의 주요 구매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사업 구조가 빠르게 커지고 고객과 최종 사용자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미국 수출통제 우회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FT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이번 새 심사에서 고객의 데이터센터를 직접 방문하고, 계약 내용을 확인하며, 최종 사용자를 면담하는 절차를 포함했다. 단순히 구매 기업의 서류만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사업과 사용처가 정당한지 따지는 방식이다.
미 상무부도 이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상무부는 감독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하며 엔비디아의 강화된 규정 준수 절차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제3국 우회 통로 차단
미국의 대중국 AI칩 통제는 수년간 강화돼왔다.
미국 정부는 중국이 첨단 AI 모델과 군사·감시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고성능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엔비디아의 최신 AI칩 수출을 제한해왔다. 그러나 중국 기업들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 제3국에 있는 관계사나 중개업체를 활용해 칩을 확보해왔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번 화이트리스트 도입은 이런 우회로를 좁히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미국 정부가 법적 제재만으로는 모든 흐름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보고, 핵심 공급자인 엔비디아의 고객 심사와 현장 확인을 사실상 수출통제 집행의 일부로 활용하는 구조다.
엔비디아는 그동안 미국 수출통제 준수를 위해 구매자를 선별해왔지만 최근에는 요구 수준과 현장 점검 범위가 모두 넓어졌다. 단순한 거래 심사에서 공급망과 최종 사용처 검증으로 단계가 올라간 셈이다.
◇슈퍼마이크로 사건이 경고음
미국의 경계심을 키운 사례는 슈퍼마이크로 관련 밀수 의혹이다.
미국 검찰은 지난 3월 슈퍼마이크로 공동창업자와 직원 등 관련 인사들을 중국으로 AI칩을 우회 반출하는 데 관여한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이들이 동남아시아 회사를 통과 법인처럼 활용해 대만에서 중국으로 엔비디아 칩이 들어간 서버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문제가 된 규모는 25억달러(약 3조7000억원)에 달한다. 검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슈퍼마이크로 서버는 내용물을 감추기 위해 다시 포장되고 무표시 상자에 담긴 것으로 조사됐다.
슈퍼마이크로는 회사가 해당 사건의 피고로 지목된 것은 아니며 미국과 대만 당국의 수사에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 수출통제가 제3국 중개망을 통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드러낸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FT는 이 사건 이후 엔비디아가 아시아 고객 실사를 한층 강화했다고 전했다.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경로를 막으려면 구매 단계에서부터 고객과 최종 사용자를 더 촘촘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AI칩 부족 심화
엔비디아의 심사 강화는 중국의 AI칩 부족을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중국은 이미 미국 수출통제와 자국 정부의 산업정책 사이에서 엔비디아 칩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은 최첨단 AI 프로세서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해왔고, 중국 정부도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엔비디아 H200 판매를 막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H200은 엔비디아 최신 제품보다 적어도 두 세대 뒤처진 제품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중국 기술기업들은 AI 에이전트와 대규모 모델 개발을 위해 여전히 높은 성능의 GPU를 필요로 한다.
AI 에이전트는 단순 챗봇보다 더 많은 연산 자원을 요구한다. 기업들이 업무 자동화와 소프트웨어 개발, 데이터 분석에 AI 에이전트를 확대 적용하면서 고성능 AI칩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중국 기술업계에서는 일부 기업이 베이징에 H200 판매 허용을 요청하고 있지만 대규모 판매 승인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 당국은 자국 반도체 기업들이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대해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중국산 칩도 공급 부족
중국 내 대체 공급도 충분하지 않다.
FT는 지난해 중국의 AI 프로세서 국내 생산량이 올해 말까지 세 배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생산 규모는 여전히 글로벌 경쟁사보다 낮고, 최첨단 제조장비 접근이 제한돼 있다.
중국 기술업계 관계자는 국내 공급업체 물량이 모두 팔렸으며, 과거에는 외면받던 낮은 등급의 칩까지 어떻게든 쓸 수 있으면 모두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수요와 공급의 격차가 매우 크다는 뜻이다. 미국의 수출통제와 엔비디아의 고객 심사 강화가 동시에 작동하면 중국 기업들은 더 비싼 우회 조달이나 성능이 낮은 자국산 칩 활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런 압박은 중국의 자체 반도체 개발을 더 밀어붙이는 요인도 될 수 있다. 미국의 제한이 강화될수록 중국 정부와 기업은 화웨이 등 국내 칩 공급망에 더 많은 자본과 정책 지원을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