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시민권 행정명령 위헌 판단…트랜스젠더 스포츠 금지 허용·정당 선거자금 제한 폐지
이미지 확대보기미국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에 제동을 걸었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부모의 체류 신분과 관계없이 시민권을 인정해 온 헌법상 원칙을 유지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이민 의제에는 큰 타격이 됐지만 대법원은 한편으로는 트랜스젠더 학생의 여성 스포츠팀 출전 제한과 정당의 선거자금 지출 확대를 허용해 문화전쟁과 선거자금 쟁점에서는 보수 진영의 손을 들어줬다.
1일(이하 현지시각) CNN과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 연방대법원은 임기 마지막 날 출생시민권, 트랜스젠더 선수 출전, 선거자금 규제 등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쟁점에 대한 판결을 전날 잇달아 내놨다.
◇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 무산
가장 큰 판결은 출생시민권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 불법체류자나 임시 체류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시민권을 제한하려 한 행정명령을 무효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원칙적으로 미국 시민이라는 기존 해석이 유지됐다.
출생시민권은 미국 수정헌법 14조에 근거한다. 남북전쟁 이후 제정된 수정헌법 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관할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미국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다수 의견에서 시민권을 “권리를 가질 권리”로 표현하며 수정헌법 14조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해 온 제한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직후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불법체류자나 단기 체류 외국인이 미국에서 자녀를 낳아 자동으로 시민권을 얻는 관행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민주당 주 정부와 시민단체들은 이 조치가 헌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 판결로 트럼프 행정부가 행정명령만으로 출생시민권을 제한하려던 시도는 좌절됐다.
◇ 트럼프, 의회 입법으로 우회 시도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직후 의회를 통한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출생시민권은 헌법 조항과 오랜 판례에 뿌리를 두고 있어 단순 법률 개정만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측 변호인들이 제기한 핵심 논리는 부모가 미국에 영구 거주할 의사가 있어야 자녀에게 출생시민권이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화당 내부에서는 출생시민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헌법상 권리를 입법으로 축소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법적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도 의회가 가능한 모든 조치를 검토해야 한다면서도 구체적인 해법은 아직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는 정치적 구호와 실제 법률 설계 사이에 간극이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 법무부는 ‘원정출산’ 단속 강화
대법원 판결 직후 법무부는 다른 방향의 대응에 나섰다.
미 법무부는 전국 연방검찰에 이른바 ‘출산 관광’ 관련 수사를 우선순위에 두라고 지시했다. 출산 관광은 외국인이 자녀에게 미국 시민권을 얻어주기 위해 출산을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행위를 뜻한다.
법무부는 이런 행위가 이민법을 악용하고 경우에 따라 형사법을 위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 중국계 고객을 대상으로 미국 출산을 알선한 업체 관계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언급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생시민권 자체를 폐지하는 데 실패하자, 관련 주변 행위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민 강경 노선을 이어가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 트랜스젠더 스포츠 제한은 인정
같은 날 대법원은 트랜스젠더 학생의 여성 스포츠팀 출전을 제한하는 주 법률에 대해서는 합헌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은 웨스트버지니아주와 아이다호주의 관련 법률을 둘러싼 소송에서 주 정부가 여학생 스포츠팀을 생물학적 여성 중심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비슷한 법률을 둔 공화당 성향 주들의 규제도 유지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판결은 성소수자 권리 운동에는 큰 패배로 받아들여진다. 대법원은 지난해에도 미성년자에 대한 성전환 관련 의료 조치를 주 정부가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번 판결까지 더해지면서 보수 우위 대법원이 트랜스젠더 권리 문제에서 주 정부의 제한 권한을 넓게 인정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다수 의견에서 학생들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여성 스포츠의 경쟁 공정성과 안전을 이유로 주 정부가 출전 기준을 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 등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반대 의견에서 다수 의견이 트랜스젠더 학생들의 헌법상 권리 주장을 지나치게 좁게 봤다고 비판했다.
◇ 미국 사회 갈등 더 커질 듯
트랜스젠더 스포츠 판결은 미국 내 문화전쟁을 더 격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보수 진영은 이번 판결을 여학생 스포츠의 공정성을 지킨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큰 승리”라고 환영했다.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도 성소수자 공동체의 권리를 지지하면서도 여성 선수의 기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트랜스젠더 선수들은 이번 판결이 차별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반발했다. 이들은 스포츠 참여가 단순한 경쟁을 넘어 학생들의 사회적 관계, 정신 건강, 소속감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이번 판결은 전국적 금지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다. 트랜스젠더 학생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스포츠 참여를 허용하는 주들은 기존 정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 성향 주들에서는 추가 규제가 확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 선거자금 규제도 50년 만에 뒤집혔다
대법원은 선거자금 관련 판결에서도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정당이 대통령·상하원 후보와 조율해 선거운동에 쓸 수 있는 지출 상한을 폐지했다. 50년 넘게 유지돼 온 연방 선거자금법의 핵심 제한 중 하나를 위헌으로 본 것이다.
이 제한은 거액 기부자가 후보 개인에게 직접 줄 수 있는 돈의 한도를 우회하지 못하도록 만든 장치였다. 기부자가 정당에 큰돈을 내고 정당이 후보와 조율해 사실상 해당 후보를 위해 돈을 쓰는 구조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대법원 보수 성향 대법관 6명은 이 제한이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캐버노 대법관은 다수 의견에서 헌법의 문언과 역사, 판례를 고려할 때 정당의 조율 지출 제한은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이는 2001년 대법원이 같은 취지의 제한을 합헌으로 봤던 선례를 뒤집은 것이다. 2010년 ‘시티즌스 유나이티드’ 판결로 기업·노조 등의 독립 정치지출 제한이 크게 풀린 데 이어, 이번에는 정당과 후보 사이의 조율 지출 규제까지 무너진 셈이다.
◇ 공화당에 단기 호재
이번 판결은 단기적으로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AP통신에 따르면 공화당 전국위원회와 상·하원 선거위원회는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당보다 큰 현금 우위를 갖고 있다. 5월 말 기준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1억2500만달러(약 1928억원) 이상의 현금을 보유한 것으로 신고했다.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공화당 상원 선거위원회는 4800만달러(약 740억원) 이상, 공화당 하원 선거위원회는 8100만달러(약 1249억원) 이상을 보유했다.
반면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현금 보유액은 1440만달러(약 222억원)였다. 민주당 상원 선거위원회는 약 3700만달러(약 571억원), 민주당 하원 선거위원회는 약 7300만달러(약 1126억원)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에서 모두 근소한 다수당 지위를 방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이 후보와 무제한으로 조율해 선거운동 지출을 할 수 있게 되면 현금 보유액이 큰 공화당 조직이 광고와 현장 선거운동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번 소송도 공화당 쪽에서 시작됐다. 공화당 상원·하원 선거위원회가 2022년 오하이오에서 소송을 냈고, 당시 오하이오 상원의원이던 JD 밴스 부통령과 스티브 채벗 전 하원의원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뒤 연방선거위원회는 해당 법률 방어를 중단하고 공화당 측 주장에 동조했다. 이는 행정부와 보수 법조계가 선거자금 규제 완화라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 진보 대법관 “정치자금 피해 커질 것”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소수 의견에서 이번 판결이 정당을 통해 후보에게 거액 자금이 흘러 들어갈 길을 열어 정치 시스템에 헤아리기 어려운 해를 끼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당이 후보 캠프의 사실상 자금 통로로 기능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개인 기부 한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기부자가 정당에 큰돈을 내고 정당이 후보와 조율해 지출하면 개인 기부 제한의 의미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도 선거자금 규제 폐지를 비판했다. 다만 무제한 독립지출이 가능한 슈퍼팩과 외부 단체가 이미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기존 조율 지출 제한이 정당의 역할을 과도하게 약화시켰다는 지적도 정치권 안팎에 있었다.
이번 판결로 미국 선거자금 구조는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게 됐다. 정당은 후보와 더 긴밀히 움직이며 광고와 선거운동 자금을 집행할 수 있고, 대형 기부자들은 정당을 통해 선거에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 보수 대법원의 복합 메시지
이날 판결들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현재 성격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대법원은 출생시민권 사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권 남용을 막았다. 수정헌법 14조의 명문과 역사적 해석을 근거로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시민권 원칙을 바꿀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는 보수 우위 대법원이라고 해서 항상 트럼프 행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스포츠와 선거자금 사건에서는 보수 진영의 핵심 주장을 받아들였다. 주 정부의 권한과 전통적 성별 구분, 정치자금 규제 완화라는 방향에서 보수 법철학이 강하게 반영됐다.
결국 이번 판결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절반의 패배이자 절반의 승리로 볼 수 있다. 이민정책의 상징적 의제였던 출생시민권 제한은 무산됐지만 문화전쟁과 선거자금 규제에서는 정치적 동력을 얻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