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주식·달러표시 채권 ‘중립’ 하향
유로존 단·중기 국채는 비중확대…“금리 3% 장기화 전망 과도”
유로존 단·중기 국채는 비중확대…“금리 3% 장기화 전망 과도”
이미지 확대보기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신흥국 주식과 신흥국 달러표시 채권에 대한 낙관론을 낮췄다.
반면 유로존 정부채권에 대해서는 더 긍정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인공지능(AI) 투자 붐이 신흥국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기회를 만들고 있지만 달러 강세와 글로벌 금리 재평가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신흥국 전체를 한꺼번에 사는 전략의 매력은 줄었다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블랙록투자연구소(BII)는 이날 발표한 중간 투자전망에서 신흥국 주식과 신흥국 달러표시 채권에 대한 투자 의견을 낮추고 유로존 정부채권 선호를 높였다. BII는 블랙록 산하 투자전략 연구 조직이다.
블랙록이 전 세계 자산시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대형 투자회사란 점을 감안하면 BII의 자산군별 의견 변화는 글로벌 자금 흐름을 가늠하는 참고 지표로 받아들여진다.
◇ 신흥국 주식, 소폭 비중확대서 중립으로
블랙록은 신흥국 주식에 대한 전반적 의견을 기존 ‘소폭 비중확대’에서 ‘중립’으로 낮췄다.
이는 신흥국 주식 전반에 대한 강한 낙관론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뜻이다. 다만 신흥국 전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블랙록은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수요를 키우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고 봤다.
특히 라틴아메리카가 거론됐다.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반도체 공급망 확충에는 구리와 리튬 같은 핵심 광물이 필요하다. 이들 원자재를 보유한 라틴아메리카 일부 국가는 AI 투자 사이클의 간접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블랙록의 시각은 신흥국 전체에 대한 일괄 매수보다 국가와 업종을 가려야 한다는 쪽으로 이동했다는 지적이다. AI 수혜가 모든 신흥국에 고르게 퍼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과 산업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4월 블랙록이 한국과 대만 등 AI 반도체 공급망 국가를 근거로 신흥국 주식에 긍정적인 의견을 냈던 흐름과 비교하면 다소 신중해진 변화다. AI 모멘텀 자체는 유지되지만, 신흥국 자산 전체를 끌어올릴 만큼의 광범위한 재료로 보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달러표시 신흥국 채권도 중립
블랙록은 신흥국 달러표시 채권에 대한 의견도 소폭 비중확대에서 중립으로 낮췄다.
달러표시 채권은 신흥국 정부나 기업이 달러로 발행한 채권이다. 투자자는 신흥국 신용위험을 부담하지만 현지 통화가 아닌 달러 자산에 투자한다는 점에서 환율 위험 구조가 다르다.
블랙록은 신흥국의 기초여건이 개선됐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위험 대비 보상 측면에서는 현지통화표시 신흥국 채권이 더 매력적이라고 진단했다.
그 결과 신흥국 현지통화 채권에 대한 의견은 중립에서 소폭 비중확대로 높였다. 블랙록은 현지통화 채권의 수익률이 변동성에 비해 매력적이고, 기초여건도 개선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신흥국 채권시장 안에서도 투자 초점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달러표시 채권처럼 비교적 전통적인 안전판을 가진 자산보다 각국 금리와 통화 흐름을 반영하는 현지통화 채권에서 더 나은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 강한 달러가 변수
신흥국에 대한 블랙록의 신중론에는 달러 흐름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달러가 약세를 보이면 일반적으로 신흥국 자산에는 우호적이다. 달러 부채 부담이 줄고, 신흥국 통화와 주식·채권시장으로 자금이 들어오기 쉬워진다. 반대로 달러가 강하면 신흥국 자산은 부담을 받는다.
블랙록은 최근 달러 강세가 미국 금리 인상 기대와 미국 자산에 대한 안정적 수요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달러의 안전자산 역할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단순히 달러 약세에 기대 신흥국 자산 전반을 사는 전략은 설득력이 약해졌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신흥국 투자 판단의 기준도 달러 방향성에서 개별 국가의 펀더멘털과 산업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에너지 의존도, 원자재 수출 비중, 정책 신뢰도, AI 인프라와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더 중요해졌다는 분석이다.
◇ 유로존 국채는 비중확대
신흥국에 대해서는 신중해졌지만 유로존 정부채권에 대해서는 더 긍정적인 의견을 냈다. 블랙록은 유로존 정부채권에 대한 의견을 중립에서 비중확대로 높였다. 특히 단기와 중기 채권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핵심 근거는 금리 전망이다. 시장은 유로존의 제한적인 정책금리가 수년간 약 3%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블랙록은 이런 전망이 과도하다고 봤다.
금리가 장기간 높은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시장의 우려가 지나치다면 단기·중기 유로존 국채는 가격 매력을 가질 수 있다. 장기채보다 금리 변동 위험은 작고 단기 자금보다 수익률은 높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블랙록은 전반적으로 장기채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 부채 증가와 인플레이션 불확실성 때문에 장기채가 예전처럼 주식 하락을 방어하는 안정적 분산 수단으로만 작동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로존 국채 선호도 장기채 전반에 대한 낙관론이라기보다 단기와 중기 구간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익 기회를 찾겠다는 전략에 가깝다.
◇ AI 붐은 계속되지만 선별 투자로 이동
이번 전망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AI 투자 붐에 대한 시각이 약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블랙록은 AI 구축 경쟁이 전력, 메모리,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희소 자원에 대한 수요를 계속 키우고 있다고 봤다. AI 인프라 투자가 글로벌 경제와 자산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크다는 판단이다.
다만 AI 수혜를 보는 자산을 고르는 방식은 더 정교해지고 있다. 미국 대형 기술주, 전력·데이터센터 인프라, 핵심 광물 생산국, 일부 신흥국 산업 등으로 수혜가 나뉘는 만큼 자산군 이름만 보고 투자하는 방식은 한계가 커졌다는 분석이다.
신흥국 주식에 대한 의견을 중립으로 낮추면서도 라틴아메리카의 인프라·광물 수요를 별도로 언급한 것은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신흥국이라는 큰 묶음보다 AI 공급망에서 실제 병목을 쥔 지역과 업종을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 두 달 만에 달라진 신흥국 온도
블랙록은 올해 들어 AI 반도체와 공급망 수혜를 이유로 신흥국 자산에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한국과 대만 등 기술 공급망 국가의 실적 개선 기대가 신흥국 주식 낙관론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이번 중간 전망에서는 신흥국 전체에 대한 비중확대를 유지하지 않았다. 이는 AI 기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 시장 가격이 상당 부분 앞서 반영됐고 거시 변수도 복잡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금리와 달러, 원자재 가격, 지정학적 리스크, 각국 정책 신뢰도에 따라 신흥국 내 수익률 차이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블랙록이 강조한 ‘선별’은 이런 환경을 반영한 표현이다.
반면 유로존 단·중기 국채는 상대적으로 명확한 투자 논리를 갖고 있다. 시장이 유럽의 고금리 장기화를 과도하게 반영했다면 해당 구간 국채는 금리 전망 조정 과정에서 수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위험자산에서 안정적 수익원으로 일부 이동
이번 블랙록의 의견 변화는 글로벌 자산 배분의 무게중심이 일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신흥국 주식과 달러표시 채권처럼 경기와 위험선호에 민감한 자산에 대해서는 신중해졌고 유로존 단·중기 국채와 신흥국 현지통화 채권처럼 수익률과 변동성의 균형을 따질 수 있는 자산에는 더 긍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는 투자 환경이 단순한 위험자산 선호 국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AI 붐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금리와 달러가 시장을 흔드는 힘도 만만치 않다. 블랙록은 이 두 흐름 사이에서 광범위한 낙관론보다 선별적 접근을 택한 셈이다.
블랙록이 신흥국 낙관론을 낮추고 유로존 국채를 높게 본 것은 세계 금융시장이 AI 성장 기대와 고금리 장기화 우려 사이에서 다시 균형점을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흥국 자산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나라와 어느 산업이 AI와 금리 환경의 실제 수혜를 받을 수 있는지를 더 엄격하게 따지는 국면으로 들어섰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