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성공이 최고의 환원” 실리콘밸리 우경화가 바꾼 억만장자 기부 공식
가입자 113명에서 43명으로 뚝… 빌 게이츠 평판 하락 속 기부 서약 이탈 가속
전통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신흥 실용주의 자본주의의 정면충돌
가입자 113명에서 43명으로 뚝… 빌 게이츠 평판 하락 속 기부 서약 이탈 가속
전통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신흥 실용주의 자본주의의 정면충돌
이미지 확대보기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최근 확산하는 억만장자들의 자선 활동 회의론, 이른바 '빌리어네어 백래시(Billionaire Backlash)'에 맞서 자신이 공동 설립한 자산 기부 서약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를 수성하기 위해 정면 돌파에 나섰다.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경제 전문 매체 CNBC와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올해 95세를 맞은 버핏 회장은 이메일 성명을 통해 기빙 플레지의 성공을 확신하며 기부 문화의 건재함을 강조했다.
이번 논란은 피터 틸을 비롯한 실리콘밸리의 보수적 거물들이 기빙 플레지를 '위선적인 올드스쿨 클럽'이라 공격하며 서약 취소를 종용한 사실이 드러나며 촉발됐다.
15년 만에 마주한 ‘기부 절벽’… 데이터가 증명하는 동력 상실 이유
기빙 플레지는 지난 2010년 버핏과 빌 게이츠 등이 세계 부호들이 생전이나 사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다. 그러나 설립 15년을 맞은 현재, 기부 열풍은 확연한 '하방 압력'을 받고 있다.
본지가 기빙 플레지의 연도별 가입자 추이를 분석한 결과, 설립 초기 5년(2010~2014년) 동안 113명에 달했던 신규 가입자 수는 이후 5년(2015~2019년) 72명으로 줄어들더니, 최근 5년(2020~2024년) 사이에는 43명까지 떨어졌다. 이는 초기 대비 가입 동력이 약 62% 급감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특히 2024년 한 해 동안 기빙 플레지에 새롭게 서명한 인원은 단 4명에 그쳤으며, 2025년에도 14명에 머물렀다.
세계적인 자산 가치 상승으로 억만장자의 수는 역대 최다를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기부 서약은 철저히 외면받는 '기부 역설'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억만장자들이 더 이상 자선 활동을 자신의 평판이나 사회적 책임의 핵심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방증으로 보고 있다.
피터 틸의 ‘독설’과 실리콘밸리 우경화가 만든 균열 분석
기부 운동의 동력 상실 배경에는 실리콘밸리 거물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가치관의 이동이 자리 잡고 있다.
페이팔 공동 창업자이자 보수 진영의 큰손인 피터 틸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빙 플레지를 "에프스타인과 인접한 가짜 베이비부머 클럽"이라며 맹비난했다. 틸은 실제로 서약자 12명가량에게 서약 취소를 권유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서명을 후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기빙 플레지 초기 멤버였던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은 최근 서약 내용을 수정해 영리 목적의 사업에도 기부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변경했다.
코인베이스 창업자 브라이언 암스트롱 역시 2024년 아무런 설명 없이 기빙 플레지를 탈퇴하며 '탈(脫) 자선' 행보에 가담했다.
사회학자 에런 호바스는 이러한 흐름을 두고 "부호들이 자선이라는 가식에 매달리기보다 비즈니스 성공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 진정한 보답이라고 믿는 '전략적 실용주의'가 득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본주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자선 무용론’의 전망과 함의
이번 사태는 단순한 기부 단체의 위기를 넘어, 자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가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성범죄자 제프리 에프스타인과 빌 게이츠의 과거 연루설이 불거지며 기빙 플레지의 도덕적 상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피터 틸과 같은 신흥 우파 자본가들은 전통적인 자선 활동이 진보적 의제(Woke)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며, 대신 '강한 기업'과 '기술 혁신'이 인류에 더 큰 이득을 준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버핏 회장은 자신의 95세 생일을 앞두고 "내가 마침내 조금 철이 든 것 같다"며 위트 섞인 소회를 밝혔지만, 그가 평생 쌓아온 '기부의 규범'은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자산가들의 기부 이탈 현상이 국내 고액 기부 문화에도 냉각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새로운 정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