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딥 피션, 캔자스 지하 1마일에 '그래비티 원자로' 박는다…세계 최초 시추공 굴착 착수
파리 원자력 정상회의 "2050년 원전 용량 세 배"…AI 전력난이 핵(核) 르네상스 앞당긴다
파리 원자력 정상회의 "2050년 원전 용량 세 배"…AI 전력난이 핵(核) 르네상스 앞당긴다
이미지 확대보기바로 그 경쟁의 최전선에서 미국의 원자력 스타트업 딥 피션(Deep Fission)이 상식을 뒤집는 방식으로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지난 12일(현지시간) 캔자스주 파슨스 그레이트 플레인스 산업단지에서 세계 최초의 지하 원자로용 시추공 굴착을 공식 시작했다고 밝혔다. 월드 뉴클리어 뉴스(World Nuclear News)와 인터레스팅 엔지니어링(Interesting Engineering)이 같은 날 보도했다. 발상은 단순하다. 석유 시추 기술로 땅을 1마일(약 1.6㎞) 뚫고, 그 아래에 15메가와트(MWe)급 소형 모듈 원자로(SMR)를 내려보내는 것이다. 지구 자체를 격납 구조물로 삼아 수십조 원짜리 콘크리트 돔 없이도 원자로를 돌리겠다는 구상이다.
이 소식이 공개된 날, 프랑스 파리에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주관 제2차 원자력 정상회의가 열렸다. 2050년까지 전 세계 원전 발전 용량을 세 배로 늘리자는 목표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기술과 정책, 두 개의 시계가 동시에 돌아가기 시작한 셈이다.
지하 1마일이 격납용기다…석유 시추+지열+원전, 세 기술의 결합
딥 피션이 개발 중인 '그래비티(Gravity) 원자로'는 세 가지 검증된 기술의 결합체다. 석유·가스 업계의 보어홀(borehole·시추공) 굴착 기술, 지열 발전의 열 전달 방식, 그리고 미국 내 95기 원전 가운데 64기에서 이미 쓰이는 가압경수로(PWR) 설계다. 새로운 원자로를 발명한 게 아니라, 기존 기술 세 가지를 조합해 설치 방식 자체를 바꾼 것이 이 회사 핵심 전략이다.
물리 법칙이 설계를 돕는다. 지하 1마일 깊이에서는 머리 위 물기둥이 자연스럽게 160기압의 압력을 만든다. 이 수치는 가압경수로 운전에 필요한 압력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지상에서는 수백억 원짜리 압력 용기가 담당하는 역할을, 지구의 중력이 공짜로 처리하는 것이다. 방사선 차폐도 마찬가지다. 주변 암반 수십억 t이 콘크리트 격납 건물 역할을 대신한다.
리즈 뮬러(Liz Muller) 딥 피션 최고경영자(CEO) 겸 공동창업자는 "첫 번째 시추공 굴착은 개념에서 건설로 전환하는 시작점"이라며 "원자력 에너지 배치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입증하는 과정"이라고 밝혔다.
현재 굴착 중인 첫 번째 시추공은 깊이 약 6000피트(약 1830m), 지름 8인치(약 20㎝) 규모다. 지질·수문·열 데이터를 수집하는 '탐사정' 성격이며, 딥 피션은 세 개의 탐사 시추공을 순서대로 뚫어 최종 원자로 설계와 규제 허가 계획에 필요한 지반 정보를 확보할 계획이다.
규제 측면에서도 시험이 계속된다. 딥 피션이 미국 핵규제위원회(NRC)에 제출한 초기 허가 서류에는 지하 깊은 곳에서의 원격 감시와 육안 점검이 어렵다는 점이 한계로 인정되어 있다. 기술이 앞서 나간 만큼 규제 당국이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8000만 달러, 건설비 –80%, 파이프라인 12.5기가와트
딥 피션의 재무 현황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회사는 지난달 10일 8000만 달러(약 1191억 원) 규모의 신규 투자 유치를 공식 발표했다. 자금 용도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미국 전력망 공급을 위한 생산 규모 확대다. 2024년 400만 달러(약 59억 5100만 원) 규모로 스텔스 모드를 끝냈던 회사가 2년 만에 자금력을 20배로 키운 것이다.
건설비 절감 주장도 구체화됐다. 딥 피션은 기존 공급망과 기술을 그대로 활용해 기존 원전 대비 건설 비용을 70~80%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조지아주 보글(Vogtle) 원전이 당초 예상의 두 배인 300억 달러(약 44조 6300억 원)를 쏟아부은 '공사 악몽'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논리다.
시장 수요도 먼저 확보했다. 딥 피션이 체결한 협력 의향서(LOI) 기준 파이프라인은 12.5기가와트(GW)에 달한다. 텍사스, 유타, 캔자스 세 곳이 초기 상업 부지 후보로 잡혀 있다. 시추공 하나는 15MWe를 생산하지만, 같은 부지에 시추공 100개를 모으면 1.5GWe를 낼 수 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 단지나 산업 클러스터 전체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연료 조달도 마쳤다. 딥 피션은 저농축 우라늄(LEU) 공급사로 우렌코 미국법인(Urenco USA)을 낙점하고 구매 계약을 맺었다. 우렌코 미국법인 존 커크패트릭 대표는 "첨단 원자로 개발사는 미래 에너지 지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로젝트 전체의 시계추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 원자로 파일럿 프로그램은 오는 7월 4일까지 최소 세 개 첨단 원자로의 임계(핵 연쇄반응 개시)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딥 피션은 이 프로그램에 선정된 10개 기업 중 하나다. IEEE 스펙트럼에 따르면 뮬러 CEO는 "7월 4일 목표 달성은 우리를 포함해 모두에게 매우 도전적"이라면서도 "2026년 안에 파일럿 원자로를 건설할 능력에 대해서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파리의 선언, 현실의 벽
딥 피션이 굴착기를 돌리던 같은 날, 파리에서 열린 제2차 원자력 정상회의는 원자력의 귀환을 공식화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에너지 안보 확보와 기후 목표 달성에 원자력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라파엘 마리아노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은 "전기화·디지털화·인공지능으로 전력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며 원자력이 해법 중 하나라고 밝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집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2년 460테라와트시(TWh)에서 2030년에는 945TWh까지 늘어 현재의 두 배 이상이 될 전망이다. 일본 전체 전력 수요와 맞먹는 수준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태양광·풍력보다 안정적인 전원으로 원자력을 지목하며, EU가 기존 원자로와 함께 소형 모듈 원자로(SMR)·4세대 원자로 개발을 추진한다고 전했다.
회의는 2050년까지 전 세계 원전 발전용량을 세 배로 늘리는 목표를 공동 선언문에 담았다. 하지만 이 목표와 현실 사이의 거리는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연료 공급 안정화, 사용후핵연료 안전 처리, 방사성 폐기물 관리, 핵심 기자재 공급망 확보, 원자력 전문 인력 양성이 동시에 해결되어야 목표가 숫자로 남지 않는다는 게 참가국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국내 원자력 업계에서도 비슷한 시각이 나온다. 삼일회계법인(PwC 코리아)은 최근 SMR 가이드북에서 "경제성 확보를 위한 진정한 대량 생산 체계에 도달하려면 평균 3000기의 SMR이 필요하다"며 초기 상업화 단계의 비용 부담이 상당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원자력에너지기구(NEA)는 2050년까지 필요한 원전 발전량 1160기가와트(GWe) 가운데 절반 이상을 SMR이 담당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SMR 시장 규모는 2160조 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땅속 1마일에서 시작된 딥 피션의 실험이 원자력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될지, 또 하나의 값비싼 도전에 그칠지는 오는 7월 4일 파일럿 원자로 임계 여부가 첫 번째 판정의 계기가 될 것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