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와 취소 불가 계약 확대, 확정 매입 의무만 950억 달러… '제2 시스코' 현실화 경고
삼성·SK하이닉스 수출 상승 국면서 터진 글로벌 경보음에 귀 기울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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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버리가 포착한 숫자, 1년 새 6배 폭증한 '묶인 돈'
버리 대표는 지난 26일(현지시간) 자신의 서브스택(Substack)에 올린 분석문에서 엔비디아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공시한 2026 회계연도 연례보고서(10-K)를 토대로 충격적 수치를 제시했다.
엔비디아가 SEC에 공시한 2026 회계연도 확정 매입 의무는 950억 달러(약 136조 2900억 원)로 전년도인 2025 회계연도의 160억 달러(약 22조 9500억 원)에서 불과 1년 만에 494%, 즉 거의 6배 가까이 불어났다. 여기에 보유 재고 평가액과 기타 장기 공급계약까지 모두 합산하면 전체 공급망 부채성 의무 총액은 1170억 달러(약 167조 8500억 원)에 달한다. 이 수치는 엔비디아가 한 해 동안 사업을 운영해 벌어들이는 연간 영업현금흐름 전액에 육박하는 규모로, 수요 충격이 발생할 경우 자체 현금으로 방어할 여력이 사실상 소진된다는 뜻이다.
계약의 성격도 심상치 않다. 2025 회계연도까지만 해도 엔비디아와 TSMC 사이의 거래는 통상적인 구매 주문 방식이었다. 그러나 2026 회계연도분 계약은 상당 부분이 '취소 불가' 조항이 명시된 장기 구매 약정으로 전환됐다. 이는 AI 수요가 예상보다 빨리 꺾이더라도 엔비디아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없으며, 조기 해지 시에는 거액의 위약금 부담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의미다. 생산 능력 선점이라는 전략적 이득의 이면에, 수요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재무적 유연성을 담보로 잡힌 셈이다.
이 수치는 비즈니스 인사이더와 배런스가 27일 독립적으로 교차 확인한 데이터이기도 하다. 버리 대표는 "엔비디아의 확정 부채성 의무가 연간 영업현금흐름 전체와 맞먹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하며, "이는 수요 감소 시나리오에서 기업이 방어적 현금을 전혀 확보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왜 TSMC가 '취소 불가' 조건을 고집했나
계약 구조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TSMC의 투자 논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TSMC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칩 양산을 위해 수십조 원 규모의 최첨단 극자외선(EUV) 설비를 증설했다. 특정 고객사 수요에 최적화된 이 설비는 수요가 사라지면 즉각 전용이 어렵다. 이에 TSMC는 투자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엔비디아에 장기·취소 불가 구매 약정과 거액의 선급금 납입을 요구했고, 엔비디아는 시장 선점을 위해 이를 수용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런 구조는 수요 가시성이 높을 때는 공급 우위를 확보하는 최선의 전략이지만, 수요가 꺾이는 순간 그 자체가 최대 부채로 역전된다"고 설명했다.
'제2의 시스코' 경고, 닷컴버블 교훈의 재소환
버리 대표가 꺼내 든 비교 모델은 2000년대 초 닷컴버블 붕괴의 상징인 시스코 시스템즈다. 당시 시스코는 폭발하는 인터넷 인프라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부품 업체와 대규모 선매입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인터넷 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수요가 급격히 꺾이자, 누적된 재고 상각 비용과 계약 위약금이 동시에 터져 대차대조표를 순식간에 망가뜨렸다.
버리 대표의 경고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는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미리 예측하고 시장과 반대 베팅(숏 포지션)으로 거액을 벌어들인 인물이다. 재무제표의 구조적 취약성 포착을 이번에 엔비디아에 적용한 것이다.
팽팽한 두 시각, 냉혹한 경고 vs 장기 성장론
현재 시장의 시각은 둘로 갈린다.
경고 측 논거는 메타(Meta)·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구글(Google) 등 빅테크의 AI 인프라 설비투자(CAPEX) 대비 수익성이 도마에 오른 점이다. AI 가속기에 수백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지만, 실제 서비스 매출 증가세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TSMC의 생산능력이 2026년을 기점으로 본궤도에 오르면 지금까지 엔비디아의 고마진을 보장했던 공급 부족 프리미엄이 해소될 가능성이 있다.
낙관 측 논거도 만만치 않다. 골드만삭스 분석팀은 최근 보고서에서 "대규모 매입 의무는 오히려 엔비디아가 향후 수년간의 시장 지배력을 선제 확보했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AI 기술의 중심이 단순 서버 구축을 넘어 추론 시장과 기업용 소프트웨어로 확산하고 있어, 근본적 수요 붕괴보다 일시적 조정에 그칠 것이라는 시각이다.
한국 반도체에 닥칠 파장, 너무 높은HBM 의존도
이 논쟁은 한국 산업계에 직결된 문제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H100·B200 칩에 탑재되는 HBM의 독점적 공급사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삼성전자 역시 HBM4 납품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만약 엔비디아가 수요 감소로 인해 구매 물량을 조정하거나, 공급망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재무적 위기에 빠질 경우, 한국 기업들의 HBM 수주 파이프라인에도 직격탄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한국거래소 통계를 보면 SK하이닉스의 주가는 엔비디아 실적 발표 사이클과의 상관계수가 0.7 이상으로 높은 동조화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엔비디아 재무 리스크는 단순한 미국 주식 이슈가 아니라 한국 수출 전선의 안전판 문제"라며 "HBM 의존도를 낮추는 포트폴리오 다변화 전략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150조 원을 웃도는 공급망 의무는 AI 수요가 탄탄하게 유지되는 한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가장 확실해 보이는 성장 서사가 흔들릴 때, 재무제표 깊숙이 숨어 있던 '취소 불가' 조항이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정적 변수로 부상한다는 사실을. 2026년의 엔비디아는 AI 시대의 영웅인가, 아니면 닷컴버블의 영광을 재현하다 추락한 시스코의 뒤를 밟는가. 그 판가름은 빅테크의 AI 투자 수익이 가시화되는 향후 2~3분기 실적 시즌에서 결판날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