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심 다자주의 쇠퇴와 ‘달러의 무기화’가 부른 조용한 이탈
국제 분산투자 필수 시대… 금값 온스당 1만 달러 시대 오나
국제 분산투자 필수 시대… 금값 온스당 1만 달러 시대 오나
이미지 확대보기세계 경제를 지탱하던 ‘달러 패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배런스는 19일(현지시각) 보도를 통해 지난 1년간 주요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DXY)가 8% 하락했으며, 투자자들이 ‘달러 이후’를 대비해야 하는 시점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주도 다자 체제의 붕괴, 제재 수단으로 전락한 달러의 무기화, 과도한 정부 지출에 따른 재정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달러의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 이제 투자자들은 미국 외 시장과 금, 그리고 대안 자산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용한 퇴사’ 시작한 달러… 중앙은행들 국채 대신 금 채운다
과거 금융 위기 때마다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던 달러의 위상이 변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각국 중앙은행의 행보에서 나타난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잔 마리아 밀레시-페레티(Gian Maria Milesi-Ferretti)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전 세계 외환보유액 중 달러 비중은 2017년 64%에서 현재 57%까지 떨어졌다.
반면 금의 비중은 같은 기간 10%에서 2025년 말 기준 25%까지 급증할 전망이다. 특히 중국, 트뤼키예, 러시아 등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에반스 데이터의 설립자 옌스 노르드빅은 이를 두고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대거 투매하는 ‘패닉 셀링’은 아니지만,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재매수하지 않고 금으로 대체하는 ‘조용한 다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자금 흐름도 이 지각변동을 뒷받침한다. 펀드 평가사 모닝스타 다이렉트 집계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주식형 펀드에서 340억 달러(약 49조 원)가 빠져나가는 동안 국제 주식형 펀드와 신흥국 펀드에는 각각 310억 달러(약 44조 원)와 150억 달러(약 21조 원)가 유입됐다.
독일·일본·남미의 반격… ‘비싸진’ 미국 자산의 대안으로 부상
달러 약세는 역설적으로 해외 자산의 투자 매력을 높이고 있다. 지정학적 위기와 미국의 불확실한 지원 속에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이 자구책을 마련하며 경제 체질 개선에 나선 덕분이다.
독일은 오는 2035년까지 국방과 기간시설에 1조 유로(약 1706조 원)를 투입할 계획을 세웠으며, 지난해 12월 공장 수주가 2년 만에 최대폭으로 증가하는 등 경기 회복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역시 사나에 다카이치 총리의 ‘책임감 있고 주도적인 재정 정책’을 바탕으로 경제 개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치적 안정과 기업 개혁이 동반된다면 일본 투자자들이 미국에 묻어둔 자산을 회수해 자국 시장으로 복귀하는 자금 회귀 현상이 강화될 수 있다.
신흥국 시장의 성장세는 더 가파르다. 올해 신흥국 기업들의 이익성장률은 29%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미국 기업 예상치의 두 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이튼 번스의 비샬 칸두자 펀드 매니저는 “유럽 금융주 채권과 멕시코, 브라질의 고금리 채권이 매력적인 투자처로 부상했다”며 해외 자산 비중을 5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밝혔다.
“금은 이제 선택 아닌 필수”… 온스당 1만 달러 전망까지
달러가 하락할 때 포트폴리오의 방패 역할을 했던 미국 국채의 ‘헤지(위험 회피)’ 기능이 약해지면서, 그 자리를 금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브릿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창립자 레이 달리오는 전체 자산의 5%에서 15%를 금에 투자할 것을 권고했다.
JP모건의 조이스 창 글로벌 리서치 총괄은 투자자들의 금 비중이 현재 3% 수준에서 4.6%까지 소폭만 상승해도 금값이 온스당 8500달러(약 1230만 원)에 이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야데니 리서치의 에드 야데니 대표는 한술 더 떠 2029년 말까지 금값이 온스당 1만 달러(약 1440만 원)를 돌파하는 시나리오가 현실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달러가 당장 기축통화 지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외환 거래의 90% 이상이 달러로 이뤄지며 미국만큼 깊고 투명한 시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씨티그룹의 드류 페팃 전략가는 “달러 방향이 S&P 500 기업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며, 오히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브로드컴 등 반도체 기업들이 달러 약세의 수혜를 입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확산과 함께 큰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중심으로 한 AI 메모리 시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챗GPT로 촉발된 생성형 AI 열풍은 고성능 반도체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술이 바로 고대역폭 메모리(HBM)다. SK하이닉스는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엔비디아(Nvidia)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HBM 시장에서 선도적인 입지를 굳혔다. 삼성전자 역시 HBM 주문 급증에 대응하며 기술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차세대 공정인 5나노 공정 수율 개선을 통해 모바일 및 웨어러블 칩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로 인해 중국 칩 제조업체들의 확장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상대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기술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폴더블 스마트폰 시장의 확대와 증강현실(AR)·혼합현실(MR) 기기 시장의 성장은 메모리 반도체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와 시스템 반도체 전반에 걸쳐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AI 메모리'라는 거대한 기회 속에서 기술적 격차를 벌리기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향후 HBM 공급망에서의 안정적 지위 확보와 차세대 초미세 공정 안착 여부가 두 기업의 장기적인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균형’이다. 전문가들은 투자자들이 뱅가드 토털 월드(VT)나 iShares MSCI ACWI 같은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해 미국 외 자산 비중을 35% 수준까지 확보하고, 금을 일정 부분 보유함으로써 ‘달러 독주 체제’의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