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반도체, 고수익 HBM 증산 올인…기존 DDR4 라인 전환하며 범용 제품 공급 급감
자동차·가전 등 '非AI' 산업 직격탄…AI발 '공급망 양극화' 현실로
자동차·가전 등 '非AI' 산업 직격탄…AI발 '공급망 양극화' 현실로
이미지 확대보기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SMIC가 이르면 2026년 심각한 '메모리 반도체 부족' 사태가 도래할 수 있다고 시장에 강력히 경고했다고 디지타임스가 1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표면적으로는 AI(인공지능)발 수요 급증이 원인이지만, 그 이면에는 AI 시장을 주도하는 K-반도체(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HBM(고대역폭 메모리) 올인' 전략이 촉발한 구조적 시장 왜곡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단순한 수급 불균형 경고가 아니다. AI 혁명이 반도체 시장 전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작용하면서, AI와 무관한 전통 산업(자동차, 가전)의 공급망이 먼저 붕괴할 수 있다는 'AI 패러독스'의 첫 번째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자오 하이쥔 SMIC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중국 제조업체들이 (2026년) 1분기 주문에 대해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시장 수요가 불투명해서가 아니라, 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메모리 반도체를 제때 확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동차부터 스마트폰,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메모리에 의존하는 모든 제조업체가 내년 가격 상승과 공급 제약에 직면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러한 경고는 SMIC만의 기우가 아니다. 일본 키옥시아 역시 2026년 유사한 수급 불균형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시장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번 사태의 진앙은 AI 데이터센터 붐이 지목된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등에 탑재되는 HBM 수요가 폭발하자,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HBM 생산에 사활을 걸고 있다. 문제는 HBM이 막대한 생산능력(CAPA)을 소모한다는 점이다.
'HBM 블랙홀'…K-반도체, 범용 D램 라인까지 HBM으로 전환
반도체 업계는 HBM이 일반 D램 대비 3배 이상의 웨이퍼 생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HBM은 D램 칩을 수직으로 8~12단까지 쌓아 올리고, TSV(실리콘 관통 전극) 공정 등 복잡한 후공정이 추가되어 생산 효율이 낮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수익성 높은 HBM 시장의 패권을 잡기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존의 범용 D램 생산 라인을 HBM용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특히 수익성이 낮은 구세대 '레거시 메모리'(DDR4, LPDDR4 등) 라인이 최우선 전환 대상이다.
K-반도체가 고수익 AI 시장에 집중하는 전략적 선택을 내린 순간, 시장에서는 정반대의 '풍선효과'가 발생했다. AI와 무관한 저가형 레거시 메모리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SMIC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이다. SMIC는 미국의 강력한 제재로 인해 HBM이나 3나노 같은 최첨단 반도체 생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SMIC의 주력 분야는 28나노 이상의 '성숙 공정(Mature nodes)'이며, 주요 고객은 자동차, 산업용 로봇, 저가 가전 및 스마트폰 제조업체다.
이들 '非AI' 전통 산업군은 HBM이나 최신 DDR5 메모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들의 제품에는 원가 경쟁력이 중요한 레거시 D램(DDR4 등)과 낸드플래시가 대량으로 투입된다. 즉, K-반도체가 수익성을 이유로 포기하고 있는 레거시 메모리 시장의 공급 부족 사태를 SMIC의 고객사들이 정면으로 맞고 있는 셈이다.
SMIC의 경고는, 자사의 로직 칩(MCU, PMIC 등)을 사가는 고객사들이 정작 짝을 이룰 '메모리'를 구하지 못해 생산 계획 자체를 세우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을 대변한다.
'AI' vs '非AI'…분열되는 반도체 공급망
결국 세계 반도체 시장은 'AI'와 '非AI'라는 두 개의 다른 세계로 급격히 분열되고 있다.
'AI 공급망'은 엔비디아(설계)-TSMC(생산)-SK하이닉스/삼성(HBM)으로 이어지는 초고성능·고수익 시장이다. 반면 '非AI 공급망'은 자동차, 가전, 산업기기 등 전통 제조업을 지탱하는 성숙 공정 및 레거시 메모리 시장이다.
문제는 자동차나 산업기기의 경우, 제품 설계 사이클이 5~10년으로 매우 길다는 점이다. 이들은 지금 당장 레거시 DDR4 설계를 최신 DDR5로 바꿀 수 없다. 기존 설계에 맞춰 향후 몇 년간 DDR4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지만, K-반도체의 'HBM 올인'으로 인해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 제재로 첨단 시장에서 밀려난 SMIC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非AI' 레거시 시장의 최대 공급자이자 방어자가 되었다. SMIC는 2025년 자본 지출을 2024년(73억 3000만 달러)과 비슷하거나 상회하는 수준으로 유지하며 레거시 공정 증설을 계속할 방침이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듯, SMIC가 스마트폰 고속 충전, 전력 관리(PMIC) 등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에서 해외 경쟁사들의 점유율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SMIC가 아무리 로직 칩을 많이 생산해도, 짝을 이룰 레거시 메모리가 시장에서 사라진다면 무용지물이다. SMIC의 경고는 'AI 낙수효과'를 기대했던 시장에 'AI 양극화'라는 차가운 현실을 보여주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다. AI발 HBM 수요가 견조한 이상, 전통 산업군의 레거시 메모리 부족 사태는 일시적 현상이 아닌 '뉴 노멀'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