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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미 투자협상 암초, 외국인 원화 헤지 급증 불러

3500억 달러 투자 약속, 외환보유고 고갈 우려로 번져…FX 스와프 시장 '들썩'
반도체 부활·WGBI 편입 기대감에 증시·채권은 활황…금융시장 '온도차' 뚜렷
한국 금융시장에 '온도차'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미 투자협상 불확실성으로 원화 가치 하락을 우려한 외국인들의 '원화 헤지'는 급증하는 반면, 반도체 부활과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기대감에 증시와 채권 시장은 활황을 보이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한국 금융시장에 '온도차'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미 투자협상 불확실성으로 원화 가치 하락을 우려한 외국인들의 '원화 헤지'는 급증하는 반면, 반도체 부활과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기대감에 증시와 채권 시장은 활황을 보이고 있다. 사진=로이터
코스피(KOSPI)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기대감에 채권 시장으로 막대한 자금이 밀려드는 등 한국 금융시장을 향한 낙관론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뜨거운 투자 열기 이면에서는 정반대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1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과의 무역 협정 과정에서 불거진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이라는 잠재적 '폭탄' 탓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원화 가치 하락에 대비하는 통화 헤지를 이례적으로 강화하고 나섰다. 한국 자산의 기초 여건(펀더멘털)은 신뢰하지만, 원화 자체의 안정성에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불안감의 진원지는 지난 7월 타결된 한미 무역 협정의 최종 마무리를 가로막는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3500억 달러 투자 약속이다. 한국 정부가 이 약속을 이행하려면 국내 외환보유고의 80%가 넘는 자금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외환시장의 불확실성은 증폭됐다. 한국이 선불 현금 지급 방식에 강력히 반발하자 미국 정부가 선납금 요구를 완화한 대체 제안을 내놓으며 협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최종 합의 내용에 따라 원화 가치가 급격히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하나은행의 남궁태헌 금융시장부 선임 매니저는 시장의 이런 '이중적' 분위기를 명확히 짚었다. 그는 16일 "해외 펀드 자금이 한국 자산으로 꾸준히 유입되고 있지만, 주식 투자자들은 이례적으로 통화 헤지를 강력하게 선호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원화에 대한 신뢰가 한국 주식에 대한 신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미국의 투자 약속에서 비롯된 잠재된 위험을 배경으로 꼽았다.

커지는 불안감…데이터로 확인된 '원화 불신'


외국인들의 원화 헤지 쏠림 현상은 외환(FX) 스와프 시장의 가격 변동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남궁 선임 매니저는 "현물 환율이 계속 약세를 보이는 데도, 헤지 수요가 급증하면서 외환 스와프 시장에서 원화 디스카운트 폭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스와프 시장에서 올해 원화 평균 디스카운트 폭은 지난해 평균보다 약 20%에서 30%가량 줄었다"고 덧붙였다. 달러를 맡기고 원화를 빌리려는 수요(헤지 수요)가 늘면서 원화 조달 비용이 그만큼 비싸졌다는 의미다. 실제 올 하반기 들어 달러 인덱스는 대체로 보합세를 유지한 반면, 원화 가치는 약 5% 하락해 약세 흐름을 보였다.

스와프 시장에서 달러를 담보로 원화를 빌리는 비용이 오르는 것은 한국 자산에 투자하는 달러 기반 투자자들의 최종 수익률을 깎아 먹을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다. 그런데도 외국인들이 비용 증가를 감수하면서까지 원화 약세 방어에 나서는 것은, 앞으로 원화 가치 변동성이 클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불안 속에서도 '바이 코리아'…반도체·채권이 이끈다


물론 한국 금융시장의 매력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 정부가 시장 친화 조치를 이어갈 것이라는 낙관론에 힘입어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로 몰려들며 코스피 지수를 사상 최고치로 밀어 올리는 주역이 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낙관론의 중심에는 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의 최전선에 선 삼성전자의 부활 기대감이 있다. 삼성전자는 과거 4나노 공정 실패로 잃었던 퀄컴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최근 2나노 공정 기반의 차세대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샘플을 퀄컴에 납품하며 파운드리 사업의 '명예 회복전'에 나섰다. 세계 1위 TSMC의 독주 체제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전략적 승부수로, TSMC보다 최대 33% 저렴한 과감한 가격 정책과 최근 테슬라와 159억 달러(약 22조 8000억 원) 규모의 차세대 자율주행 칩 생산 계약을 맺는 등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다. 삼성의 이러한 행보는 한국 대표 기술주의 경쟁력 회복과 미래 성장성에 대한 강력한 신호로 받아들여지며 외국인 투자 심리를 이끄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채권 시장의 열기는 한층 뜨겁다. 내년 4월로 예정된 한국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을 앞두고 '바이 코리아' 행렬은 빨라지고 있다.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올 9월까지 누적으로 318억 달러 규모의 한국 채권을 순매수했다. 2024년 한 해 동안 기록한 188억 달러와 2023년의 107억 달러를 이미 훌쩍 웃도는 압도적인 규모다.
이처럼 한국 금융시장은 증시와 채권 시장의 기초 여건에 대한 강한 신뢰와 거시경제 불확실성에 따른 원화 약세 우려가 공존하는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남궁 선임 매니저는 채권 자금 유입이 앞으로도 헤지 수요와 외환 스와프 시장의 상승 압력을 계속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만약 한미 간 투자 협상이 늦어지거나 불확실성이 커진다면, 외환보유액 부담이 커지고 이는 다시 원화 약세와 외국인 헤지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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