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통화 유출·공개 망신주기…네타냐후·하마스 동시 압박
2년 만의 휴전 합의는 '트럼프 20개항' 첫 단계…중동 외교 새 변수 부상
2년 만의 휴전 합의는 '트럼프 20개항' 첫 단계…중동 외교 새 변수 부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성'이 2년간 멈춰 섰던 중동 평화의 시계를 다시 움직이고 있다. 전통 외교의 문법을 파괴한다는 비판 속에서 오히려 그의 거친 직설과 노골적인 압박이 난마처럼 얽힌 가자지구 분쟁의 돌파구를 열었다고 외신 '더 컨버세이션'이 9일(현지시각) 평가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 책임을 떠넘기는 그의 독특한 협상 방식, 이른바 '죽은 고양이 외교(dead cat diplomacy)'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하마스를 동시에 협상 테이블로 불러냈다는 분석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0월 4일 트럼프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 간의 비공개 전화 통화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마스가 자신의 20개항 휴전안 일부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축하할 일도, 의미도 없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왜 항상 그렇게 빌어먹을 정도로 부정적이냐. 이건 승리다. 받아들여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이 대화 내용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언론에 의도적으로 유출됐다는 점이 핵심이다. 과거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네타냐후 총리를 비공개적으로 강하게 질책해왔지만, 발언 직후 즉각 공개해 압박하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이번 정보 유출은 협상이 결렬될 때 그 책임을 네타냐후 총리에게 돌리려는 명백한 계산이 깔린 행보였다. 이를 통해 네타냐후 총리는 협상에 협조하지 않는 인물로 여론에 새겨졌다. 미묘함이나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이 노골적인 책임 전가 방식이 바로 '죽은 고양이 외교'의 정수다.
협상판 깨는 '죽은 고양이'…베이커 前 국무장관의 발명품
베이커 장관은 실제로 이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협상가 하난 아슈라위에게 "죽은 고양이가 당신네 문 앞에서 죽게 놔두지 마시오!"라고 경고했으며, "나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당신들과는 시장(souk)이 절대 끝나지 않는군"이라며 협상판을 엎을 듯한 태도를 보였다. 시리아의 파루크 알샤라 외무장관에게는 아슈라위를 통해 "모든 게 끝났다고 전하시오. 나는 오늘 저녁 비행기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날린 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나는 죽어라 일하는데 당신에게선 아무런 협조도 얻지 못하고 있다"며 "이 죽은 고양이를 그의 문 앞에 남겨둘 것"이라고 보좌관에게 말하며 압박했다.
그 결과, 어떤 협상 당사자도 평화의 파괴자라는 공개 비난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고 모두 마드리드행을 택했다. 이처럼 '죽은 고양이 외교'가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상대가 이를 '마지막 기회'라는 위협으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 중재자의 행동이 '신뢰할 만한 조치'로 여겨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압박받는 당사자가 위협을 무시하기 어려운 '내부 취약점'이 존재해야 한다.
모욕감 무기 삼은 트럼프…네타냐후·하마스 동시 겨냥
베이커와 외교 수완 면에서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본능에 따라 활용하며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모두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는 양측의 불안정한 국내 입지를 정확히 파고들며 자신의 위협이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각인시켰다.
트럼프는 네타냐후를 여러 방향에서 압박했다. 지난 9월 9일, 이스라엘이 카타르 도하에서 하마스 협상단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자 트럼프는 네타냐후가 카타르 총리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도록 강요했다. 트럼프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전화기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지켜보는 가운데 네타냐후 총리가 원고를 읽으며 사과하는 이미지는 '이 모든 혼란의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는 노골적인 공개 질책이었다. 이스라엘의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트럼프는 예측 불가능하며 이스라엘 입장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네타냐후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고 평가했다. 또한 트럼프는 자신의 SNS를 통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현수막이 걸린 텔아비브의 반정부 시위 사진을 게시하며 네타냐후의 정치 기반을 흔들었다.
하마스를 향한 '죽은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는 하마스를 협상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한 채 이스라엘과 휴전안의 큰 그림을 짰다. 이후 네타냐후와의 공동 기자회견과 공식 석상에서 하마스가 평화의 유일한 걸림돌임을 명확히 하며 모든 책임을 하마스에 떠넘겼다. 가자지구 내 군사 행동을 지지해 온 트럼프의 전력을 감안할 때 매우 신뢰도 높은 위협이었으며,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하마스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키는 결정타였다. 이러한 거침없는 공개 비난은 네타냐후와 하마스 모두에게 책임을 피할 여지를 최소화하는 강력한 외압으로 작용했다.
이번 합의는 전쟁 발발 2년 만에 휴전을 끌어낸 중대한 외교 진전으로, 트럼프가 내세운 20개 항목 휴전안의 첫 단계를 상호 수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평화안은 유럽과 아랍 국가들이 추진해 온 방안과도 상당 부분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걸프 지역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협상 환경을 조성한 결과라는 점에서 뜻이 깊다.
트럼프식 '죽은 고양이 외교'는 전통 외교의 신중함이나 전략상 인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날것 그대로의 연극 같은 힘은 기존의 외교 문법으로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협상의 판도를 재편했다. 공개 망신과 책임 전가를 무기 삼아 두 완고한 적수를 타협의 길로 밀어 넣은 것이다. 아직 완전한 평화가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이 강압적인 방식이 수년간 누적된 외교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가자 전쟁의 향방에 중요한 변곡점을 만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 중동 평화 협상에서 이런 식의 직접이고 공개적인 외교술이 한 축으로 다뤄질 가능성도 나온다. 어쩌면 이 외교 방식이 트럼프에게 그토록 원하던 노벨 평화상을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