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불안 속 안전자산 부상…반도체 산업 수요 겹쳐 가격 급등
금-은 비율, 역사적 평균 크게 웃돌아…"추가 상승 여력 충분"
금-은 비율, 역사적 평균 크게 웃돌아…"추가 상승 여력 충분"

지난 13일까지 은 선물 가격은 연초보다 46.47% 올랐다. 이는 코로나19 대유행이 촉발한 불확실성 속에서 세운 2020년의 연간 상승률 47.7%(직전 최고 기록)에 거의 다다른 수치다. 현재의 상승세가 대유행 시기와 맞먹는 강력한 추진력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급등세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대다수 경제학자가 올해 경기 침체는 없을 것으로 내다보는데도, 국제 무역 질서 재편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독립성 훼손 우려 같은 지정학적 위험이 커지면서 안전자산인 은과 금의 수요가 크게 늘었다.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투자자들이 귀금속 시장으로 몰리는 것이다. 귀금속은 다른 금융 자산과 달리 위기 상황에서도 가치를 지키는 힘이 있다.
월스트리트의 대표적인 비관론자로, 경제와 주식 시장에 대해 꾸준히 부정적인 생각을 밝혀 온 로젠버그 리서치의 데이비드 로젠버그 대표는 "개인 계좌로 안전 금고에 보관할 금괴와 은괴를 대량 사들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귀금속을 경기 불확실성의 피난처로 여기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은 고유의 산업재 가치도 한몫했다. 은은 현존하는 금속 가운데 전기 전도성이 가장 뛰어나,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폭발적으로 크는 반도체 산업의 핵심 소재로 쓰인다. 이처럼 안전자산과 산업재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두 얼굴'이 은의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다.
'저평가' 신호 보내는 금-은 비율
주목할 점은 가파른 상승세에도 은이 여전히 금보다 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 금 역시 올해 들어 38.8% 오르며 1979년 이후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다. 금의 이런 강세는 은 투자자들에게도 청신호가 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지표가 '금-은 비율'이다. 금 1온스를 사는 데 필요한 은의 온스 수를 나타내는 이 비율은 현재 86배 수준이다. 다우존스 마켓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50년과 20년 평균치가 각각 63배, 70배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으로 높다. 비율이 높을수록 은의 가치가 금보다 상대적으로 낮다는 뜻이다.
이런 저평가 현상은 연준의 통화정책 완화 시기와 비교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연준이 이번 주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지난해 9월 금리 인하가 시작된 뒤 금-은 비율은 평균 90배를 기록했다.
지난 금리 완화 시기와 견줘 봐도 현재 비율은 월등히 높다. 2019년 8월부터 2020년 3월까지는 평균 87배였고, 국제 금융위기 때인 2007년 9월부터 2008년 12월까지는 59배에 그쳤다. 2001년 1월부터 2003년 6월 사이에도 평균 67배였다. 과거 수치들은 현재 은값이 금에 비해 현저히 저렴하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금보다 은"…월가도 주목하는 매력
이에 따라 시장 전문가들은 은의 추가 상승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투자 분석기관 '베어 트랩스 리포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금 가격 대비 은 가격을 언급하며 "금과 금광주 투자는 줄였지만, 은에 대한 매수 투자 의견은 유지한다"고 밝혔다.
가벨리 골드 펀드의 크리스 만치니 공동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금값이 계속 오르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은이 개인 투자자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금값 상승이 부담스러운 투자자들이 대체재인 은으로 눈을 돌리면서 새로운 수요를 만들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제는 금뿐만 아니라 은 역시 시장에서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