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토모·워크맨 등 대기업, 첨단 신소재 개발 주도
전통·기술 잇는 디자이너 협업, 쪼그라든 산업에 새 활력
전통·기술 잇는 디자이너 협업, 쪼그라든 산업에 새 활력

◇ 스스로 온도 조절하고 구멍 메워…'입는 기술'의 진화
'수면을 휴대한다'는 개념으로 개발한 'ZZZN 슬립 어패럴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NTT DX 파트너의 의뢰로 디자인 기업 고넬이 제작한 이 의류는 반지 모양 기기에서 측정한 심박수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장된 음향과 조명을 작동시켜 사용자의 수면을 유도한다. 핵심 소재는 파베스트가 개발한 '고덴시 섬유'다. 본래 식품 신선도 유지용 시트에 쓰던 이 기술은, 세라믹을 혼합한 섬유가 인체의 원적외선을 흡수·방사해 자연스러운 온기를 유지하는 원리다.
스미토모화학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번거로움을 해결할 소재를 내놨다. 온도 조절 수지 '콘포마'로 만든 실로 짠 원단은 주변 환경에 따라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해 쾌적 온도인 섭씨 20~35도를 유지한다. 기존 소재와 달리 흡·방열 과정에서 형태가 변하지 않는 고체 상태를 유지해 그 기능이 반영구적이고,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스미토모관' 안내원 유니폼에 실제 쓴다. 스미토모화학의 스즈키 도시야키 담당자는 "한 장의 원단으로 따뜻함과 시원함을 모두 잡았다"고 설명한다.
다른 업종의 진출도 활발하다. 스미토모금속광산은 희소금속 화합물 미립자를 섬유에 섞은 '솔라멘트'를 개발했다. 이 소재는 근적외선을 흡수해 발열하는 동시에, 피부에서 떨어뜨리면 열을 막는다. 특히 피부 노화의 원인이 되는 근적외선을 막고,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한 불법 촬영까지 막는 기능을 갖춰 스포츠웨어와 양산 등에 쓰고 있으며, 독일 국제디자인상도 받았다. 스미토모금속광산의 이시바시 게이스케 담당자는 "의류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여 다양한 분야로 용도를 넓혀갈 것"이라고 밝혔다.
워크맨이 개발한 자가 복구 원단 '리페어테크'도 놀랍다. 바늘구멍이 난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면 순식간에 구멍이 사라진다. 최대 직경 0.9mm의 구멍까지 막는다. 다운 재킷의 깃털 빠짐을 막으려고 개발한 이 기술은 탄력 있는 실의 가공법과 짜임을 정교하게 조절하는 방식으로 구현했다. 워크맨의 하쿠라 유타로 담당자는 "고객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는 기술이지만, 그걸로 만족한다"며 "매장에서는 '마법이냐'는 질문도 받는다"고 전했다.
◇ "기능이 패션이 될 수 있는가"…기술과 디자인을 잇는 장인들
이러한 혁신 소재의 등장은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무사시노미술대학 교수인 쓰무라 고스케 씨는 "훌륭한 기능성 소재가 늘고 있다"면서도 "기능이 패션이 될 수 있는지는 디자이너의 지혜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를 현실로 만드는 디자이너도 있다. 텍스타일 제작사 누노(NUNO)의 스도 레이코 대표는 2026년 문을 열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신관의 커튼을 제작했다. 94%의 빛을 막으면서도 외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스퍼터링(금속 분사 기술)'을 이용해 5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했다. 그는 "이런 작업이 가능한 곳은 일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드디어 완성했을 때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회상했다. 스도 대표는 일본 26개 지역 115개 공장과 협력하며 전통 기술과 현대 기술을 결합한 독창적인 원단을 만들어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이 영구 소장했다.
사용자가 직접 디자인을 완성하는 '참여형 직물'을 만드는 히무로 유리 디자이너도 있다. 그의 대표작 '스닙 스냅'은 잔디 모양으로 짠 원단의 특정 부분을 가위로 자르면 그 속에서 새나 도마뱀 같은 숨은 그림이 나타나는 구조다. 히무로 디자이너는 "사람의 손길로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은 마음을 움직인다"며 "그 변화가 미소로 이어지는, 본 적 없는 것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가교' 자처한 디자이너, 쇠락한 공장에 숨결 불어넣다
한편, 가지와라 가나코 디자이너는 쇠퇴하는 공장과 브랜드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한다. 그는 "제조업은 일본의 원점이자 재산"이라며 "사업을 일으켜 제조업의 미래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조언을 받은 모리카와레이스는 레이스 직기로 데님이나 트위드 질감의 원단을 만드는 데 성공, '안단테'라는 자체 브랜드를 내놓아 조르지오 아르마니 같은 해외 명품 브랜드에 납품하고 있다.
◇ 규모는 줄었지만… 세계가 인정한 '메이드 인 재팬'의 저력
일본의 섬유 산업은 거품 경제 붕괴 뒤 크게 위축됐다. 관련 사업체 수는 1만 3000여 개로 20년 전에 비해 절반 아래로 줄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은 기업들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다. 이탈리아 남성복 박람회 '피티 이마지네 우오모'의 라포 찬키 디렉터는 "일본의 직물 산업은 세계 최고의 품질"이라고 단언했다.
디자이너들 역시 일본 제조업의 강점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정신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세를 꼽는다. 스도 대표는 "일본 공장들은 압도적으로 수고와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고, 가지와라 디자이너는 "장인들의 완벽주의와 모든 공정에 깃든 세심함"을 강조했다.
대량 생산의 시대를 지나, 일본의 직물은 이제 단순한 산업 제품을 넘어 '스마트 텍스타일'처럼 기술력과 미의식, 문화를 구현하는 새로운 가치로 진화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