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경쟁력 약화된 애플, '단순 기기 제조사' 전락 우려 목소리
성공과 실패 갈림길…'시리 이상향' 구축이냐, 기술 종속 심화냐
성공과 실패 갈림길…'시리 이상향' 구축이냐, 기술 종속 심화냐

지난 7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따르면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에게 2025년은 여러모로 어려운 한 해로 기록될 듯하다. 음성 비서 '시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관세 문제와 반독점 조사 가능성, 구글과의 검색 제휴 논란 등 악재가 잇따랐다. 야심 차게 내놓은 '비전 프로'의 존재감도 희미해졌다.
팀 쿡 최고경영자가 "헤이 시리, 상황이 곧 나아질까?"라고 질문했을 때, 시리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가벼운 코로나19 증상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 일주일 뒤에 나아지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답한 일화는 현재 애플이 마주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25년 애플(AAPL, -1.14%▼)은 상황이 크게 나빠지거나, 거꾸로 극적인 반전을 이룰 수 있는 갈림길에 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 AI 경쟁력, 시험대 오른 애플
이 모든 문제 가운데 인공지능이 장기적으로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애플은 팀 쿡 최고경영자가 강조해 온 "소프트웨어, 기기, 서비스의 긴밀한 통합"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최근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같은 경쟁사보다 뒤처진다는 평가가 많다.
지난 수요일, 알파벳(구글 모회사, GOOGL, -7.26%▼) 반독점 소송 증언에 나선 에디 큐 애플 서비스 부문 수석 부사장은 "애플이 인공지능 기업들과 손잡고 '사파리'와 다른 제품에 더 많은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와 디 인포메이션 같은 외국 언론은 애플이 시리 문제 해결을 위해 내부 변화를 꾀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애플 대변인은 이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애플이 선택할 수 있는 인공지능 미래 각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 시나리오 1: AI 실패, '그릇'으로 전락하나
WSJ은 애플이 인공지능 경쟁에서 뒤처질 경우, 시리의 기능 부족과 괴로움(Misery)을 빗대어 '시리 실패(Mis-Siri)'의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표현했다. 이 길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첫째, '그릇 골짜기(Vessel Valley)'이다. 애플의 뛰어난 기기가 구글 지메일, 문서, 달력처럼 다른 회사 인공지능 제품을 담는 단순한 '그릇'으로 전락하는 각본이다. 이미 챗GPT의 음성 방식이나 퍼플렉시티의 음성 비서가 아이폰 기능을 일부 대신하고 있다. 에디 큐 수석 부사장은 법정 증언에서 "애플이 퍼플렉시티와 아이폰 통합 심화에 대해 논의했다"며 "오픈AI, 퍼플렉시티, 앤스로픽 등 인공지능 검색 제공업체들이 구글 같은 전통 검색 엔진을 대신할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둘째, '기기 절벽(Hardware Bluffs)'이다.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잃으면 애플의 기기 우위, 특히 착용형 기기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잃을 수 있다. 메타는 카메라를 단 선글라스를 인공지능 기기로 발전시켰으며, 구글도 경쟁 안경을 개발하고 있다. 오픈AI는 전 애플 디자인 총괄 조니 아이브와 손잡고 화면 없는 새 기기를 개발한다는 소문도 있다. 애플 역시 카메라를 단 에어팟, 스마트 안경 등을 개발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핵심 인공지능 기술 없이는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애플을 연구해 온 데이비드 요피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애플은 대표적인 빠른 추격자가 되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더는 선도 혁신가가 아닐 것"이라며 "이것이 끝은 아니지만, 너무 뒤처지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 시나리오 2: AI 성공, '시리 이상향' 열리나
다른 길은 '시리 이상향(Siri-topia)'으로 가는 긍정 각본이다. 이 각본에서 애플은 모든 인공지능 문제를 풀고, 소형·대형 언어 모델과 자연어 처리 능력을 키운다.
첫째, '로봇 안착지(Bot's Landing)'다. 시리는 더는 우스꽝스러운 답변 대신, 메타나 오픈AI의 비서처럼 깊이 있는 지식과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갖추고 조명 조절, 차고 문 열기 등 실제 작업을 한다.
둘째, '착용형 기기 낙원(Wearable Wonderland)'이다. 똑똑해진 시리가 들어간 애플 선글라스는 사용자가 보는 것을 알아채 발진이나 특정 인물 정보를 알려준다. 애플 워치는 마침내 '명의' 팀 쿡 박사가 항상 꿈꿔왔던 의료 보조 장치가 된다. 증상을 설명하고 건강 조언을 주며 질병을 예측하는 등 참된 의료 보조 장치로 나아간다.
셋째, '자동화 길목(Automation Alley)'이다. 애플의 가정용 로봇이 바닥 청소, 빨래 개기, 커피 만들기 등을 맡으며, 애완동물 미용 예약을 대신해 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서비스는 한 달에 29.99달러를 내는 '애플 지능형 서비스+(Apple Intelligence+)' 구독으로 쓸 수 있을 듯하다.
◇ 기로에 선 애플, 향후 전략은?
에디 큐 수석 부사장은 증언에서 "터무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10년 뒤에는 아이폰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며 "인공지능 같은 기술 변화는 새 시장 참여자와 새 제품을 위한 새 기회를 만든다"고 말했다. 애플이 다음 세대 기술의 중심이 되려면, 빈 약속 없이 더욱 속도를 내야 할 듯하다.
애플이 '시리 이상향'으로 얼마나 빠르게 나아가는지는 다음 달 열릴 애플 세계 개발자 회의(WWDC)에서 윤곽이 드러날 듯하다.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소프트웨어 기술 부문 수석 부사장은 지난해 10월 "이 기술이 자리 잡는 데는 여러 해,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리는 오랜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업계는 이 기술이 구현되는 시점이 2035년까지 늦춰지지 않기를 바란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