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비용 2배 이상 상승 우려...美·中 기술 패권 경쟁 속 韓 기업 딜레마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반도체 제재 강화 가능성이 한국 반도체 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중국 경제 전문 매체 eet-차이나는 지난 3일(현지시각) SK하이닉스가 올해 초부터 중국산 전자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 사용 중단을 검토 중이며, 삼성전자도 곧 이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SK하이닉스 내부 관계자는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중국산 EDA 소프트웨어 사용 여부를 긴급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기업의 중국 기술 사용을 더욱 제한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 韓 반도체 기업, 성능·가격 매력에 중국 EDA 도입했으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022년부터 화대구천(华大九天), 개륜전자(概伦电子) 등 중국 EDA 제품을 채택했다. 이들 제품은 주로 아날로그 회로 설계와 소자 모델링 분야에 활용됐다.
삼성전자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EDA 핵심 공급업체는 6개사이며, 이 중 약 3분의 1인 2개사가 중국 기업이다. 여기에 개륜전자를 추가하면 총 7개사 중 3개사가 중국 기업으로, 전체 핵심 공급업체의 약 43%를 차지하게 된다. 중국 EDA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10% 미만에 불과하다. 이는 글로벌 EDA 시장을 장악한 미국의 신시스템즈(Synopsys), 케이던스(Cadence), 독일의 지멘스 EDA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 美 압박과 기술 의존성의 딜레마
2024년 기준 글로벌 EDA 시장에서 신시스템즈는 32%, 케이던스는 29%, 지멘스 EDA는 13%의 점유율을 보이며 전체 시장의 74%를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성숙 공정부터 3나노미터(nm), 2나노미터까지 전 공정 단계를 지원하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 한국 기업들은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특히 2024년 말 미국 정부는 화대구천의 한국 자회사를 수출통제 대상인 '엔티티 리스트'에 포함시키며 중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미국 '반도체 법안'에 따라 인디애나주 공장 건설을 위한 수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은 상태로, 미국의 기술 통제 정책에 협조해야 하는 입장이다.
◇ 中 EDA 사용 중단 시 설계비용 2배 이상 상승 불가피
업계 관계자들은 "미국 EDA 가격이 중국 제품보다 두 배 이상 비싸기 때문에, 중국 EDA 사용 중단 시 반도체 설계 비용이 크게 상승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공급망이 미국으로 일원화될 경우 이러한 비용 부담은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한편 중국 EDA 기술 수준도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 개륜전자는 2024년 말 고성능 병렬 시뮬레이터 '나노스파이스(NanoSpice)'가 삼성 파운드리의 3/4나노미터 공정 기술 인증을 통과했다고 발표했다. 이 기업의 소자 모델링 소프트웨어는 대만 TSMC의 5나노미터 생산라인에도 채택됐다.
또한, 중국 홍신미나(鸿芯微纳)는 자체 개발한 정적 타이밍 검증 도구 'CHIMETIME'이 2024년 초 삼성의 5나노미터 EUV 공정 인증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이 기업은 이미 2022년과 2023년에 자체 개발한 레이아웃 배치 도구 'AGUDA'와 로직 합성 도구 'ROCSYN'으로 삼성 5나노미터 공정 인증을 획득한 바 있다.
◇ 韓 기업의 中 투자와 파운드리 사업 영향 우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메모리 시장 1, 2위 기업으로 중국에 대규모 투자를 해왔다. 업계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약 40%를 시안 공장에서, SK하이닉스는 D램 생산량의 약 40%를 우시 공장에서, 낸드플래시의 20%를 대련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또한, SK하이닉스는 충칭에 패키징 공장을, 삼성은 쑤저우에 후공정 공장을 운영 중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삼성의 웨이퍼 파운드리 사업(SAFE™ 생태계)이 중국 고객의 국산 EDA 도구 사용을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EDA 전면 중단 시 일부 파운드리 주문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eet-차이나는 "중국 EDA 기업의 경우, 화대구천의 해외 매출이 전체의 10% 미만으로 한국의 사용 중단이 직접적 타격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장기적으로 국제화 전략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화웨이 홍멍(鸿蒙) 시스템의 성공 사례가 외부 봉쇄가 오히려 자주 혁신을 가속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중국 기업들이 외부 제재를 통해 자체 기술력 강화에 더욱 집중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의 선택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기업의 기술 선택 문제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술 자주성, 공급망 안보, 시장 접근성, 지정학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 위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며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자체 경쟁력 확보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