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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농축·재처리 산업 확대… 핵잠은 운용 인력·정비체계 먼저 갖춰야"

핵연료 공급망과 사용후핵연료 저장 문제
"한미·한불 협력, 전략적 중강국 연대로 풀어야"
한국의 핵안보 프로젝트6.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의 핵안보 프로젝트6.

한국 원자력 산업이 당면한 과제가 원전 건설을 넘어 핵연료 공급과 사용후핵연료 관리, 나아가 핵추진잠수함의 지속 운용 능력으로 넓어지고 있다. '한국의 핵안보 프로젝트6'는 핵 농축과 재처리는 기술 확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과 저장시설, 동맹관계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전략적 사안으로 제시했다.

이 책 제57장은 세계 핵연료 공급망의 변화와 국내 사용후핵연료 저장 문제를 동시에 조명한다.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에 원전 확대와 소형모듈원자로(SMR),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증가가 겹치면서 핵연료 시장의 재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농축시설은 단기간에 늘리기 어렵고 공급 주체도 제한적이어서 안정적인 핵연료 확보가 국가 차원의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단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국내 주요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은 2030년대 초부터 순차적인 포화 압박에 직면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결국 한국은 핵연료주기의 앞단에서는 공급 불확실성, 뒷단에서는 저장과 처리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농축·재처리를 에너지 안보와 전략적 선택권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이런 선택지를 둘러싼 핵심 제도 가운데 하나다. 제58장은 이 협정을 한국 원자력 산업 성장에 기여한 협력의 틀인 동시에 농축과 재처리 등 민감한 활동을 제약하는 통제 장치라는 관점에서 살핀다.

동맹의 안보 보장이 확실하다면 이러한 제약은 비확산을 위한 공동 관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반대로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 경우 같은 제약이 한국의 정책 선택 폭을 좁히는 요소로 인식될 여지가 있다. 책은 협정의 폐기나 한미 원자력동맹의 해체보다 양국의 책임과 역할을 조정하는 방향에 무게를 둔다. 한국은 투명성과 검증, 비확산 의무를 강화하고 미국은 한국을 단순한 관리 대상이 아닌 위험을 함께 부담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축 분야에서는 유렌코(URENCO)가 하나의 협력 모델로 제시된다. 제59장은 영국·네덜란드·독일이 공동으로 통제하는 유렌코의 구조에 주목하면서 독자적인 농축 능력 확보와 외부 공급에 대한 전면 의존 사이에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이 검토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장기 공급계약과 투자형 협력, 안정적인 물량 인수권 확보, 핵심 기술을 직접 이전받지 않는 블랙박스형 시설협력 등이 거론된다. 장기적으로는 차세대 농축기술 협력까지 시야에 넣을 수 있다는 구상이다. 당장 모든 기술을 확보하는 것보다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고 협력을 통해 산업 경험을 축적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단계적 접근법이라는 판단이다.
사용후핵연료 문제에서는 저장시설 확충과 국제협력을 병행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이어진다. 제60장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을 단기간에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중간저장과 건식저장 확대를 우선 검토하면서 재처리 가능성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본다.

국가별 선택은 서로 다르다. 미국은 상업적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중단했지만 프랑스는 라아그(La Hague)를 중심으로 관련 산업과 경험을 축적했다. 일본 역시 프랑스와 장기간 협력하며 재처리 분야의 기술과 인력을 확보해 왔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특정 국가를 우회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할을 나누는 외교다. 미국과는 한미 원자력협정과 사전 동의, 비확산·검증 문제를 조율하고 프랑스와는 재처리 기술을 비롯해 산업·안전·인력 분야의 경험을 공유하는 구도가 제시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사례는 핵잠재력과 실제 핵무장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제61장은 일본이 비핵 3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상업적 농축·재처리 시설과 상당한 규모의 플루토늄, 우주발사체 및 정밀 제조기술, 고도의 원자력 인력을 갖춘 점을 짚는다.

기술적 능력이 높은 수준이라고 해서 곧바로 핵무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내 정치와 국민 여론, 미국과의 동맹관계, 주변국의 대응, 경제적 제재 가능성 등이 실제 선택을 결정하는 변수다. 일본 사례의 핵심은 핵잠재력과 핵무장이 별개의 개념이라는 데 있으면서도 안보환경과 동맹에 대한 신뢰가 달라지면 두 영역 사이의 정치적 거리가 좁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대만의 과거 핵개발 시도는 국가 차원의 역량과 외교 환경이 갖춰지지 않을 경우 독자적인 핵옵션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제62장과 제63장은 박정희 정부와 대만의 사례를 통해 미국의 외교적 압박, 기술·경제적 제재 가능성, 정책 추진체계의 취약성, 정보 유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제64장이 주목하는 변수는 '사람'이다. 한국·영국·대만의 사례를 통해 핵 관련 국가전략에서는 시설이나 장비 못지않게 내부자 관리와 조직 보안이 중요하다고 분석한다. 외국 정보기관의 관심은 물리적 시설에만 머물지 않고 정책 결정자와 과학자, 실무자의 판단과 동향으로까지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안은 정보를 숨기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정책 목표를 조직 내부에서 공유하고 참여 인력의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며 정보 접근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민감한 국가전략일수록 기술적 장벽뿐 아니라 조직의 신뢰와 통제체계가 지속 가능성을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안보 협력의 외연을 넓히자는 구상도 등장한다. 제65장은 한국·일본·프랑스·영국·독일을 묶는 전략적 중강국 5개국 안보협력체 'SMP5'를 제안한다.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은 아니지만 경제력과 군사력, 원자력·조선·방산 분야의 역량을 가진 국가들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자는 취지다.

SMP5는 한미동맹이나 NATO를 대체하는 조직이 아니라 추가적인 협력망으로 설정된다. 핵안보전략대화와 원자력·핵추진 협력뿐 아니라 방산·공급망, 해양영역인식, 사이버·우주·인공지능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넓히는 방식이다. 독자적인 핵옵션보다 동맹과 우호국 간 제도적 신뢰를 확대하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 선택지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책의 논리다.

핵추진잠수함 분야에서는 건조 역량보다 운용 인력과 정비체계를 먼저 갖춰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제66장과 제67장은 미국과 호주의 사례를 통해 교육·자격관리·운용 규율과 안전문화가 핵추진 전력의 기반이라고 분석한다. 호주는 AUKUS를 계기로 장교와 승조원을 미국의 교육 및 승함 체계에 단계적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한국의 경우 저농축우라늄(LEU) 기반 해군 원자로와 예상 함대 규모 등을 감안하면 프랑스의 경험이 참고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프랑스는 첫 핵추진잠수함 취역 약 15년 전에 군사원자력응용학교(EAMEA)를 세우고 승조원과 교관, 정비·안전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한불 협력 역시 한국 인력의 장기적인 해외 의존보다 국내에서 교육과 평가, 자격 부여가 가능한 체계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제안이다.

마지막으로 제68장은 핵추진잠수함의 성패를 건조 실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미국과 영국의 정비 병목 사례는 뛰어난 설계·건조 능력을 갖췄더라도 도크와 숙련인력, 예비부품, 공급망, 일정관리 체계가 부족하면 함정이 실제 전력으로 활용되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가 계획대정비(IPER), 통합 운용유지(MCO), 함대지원청(SSF), 장기 정비계획과 전용기지를 연계해 운용 생태계를 구축한 점도 참고 대상으로 제시된다. 한국 역시 설계 단계부터 정비성과 가용률을 고려하고 전용 정비기지, 전문인력, 공급망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은 특정 기술 하나를 확보하는 데 있지 않다. 농축과 재처리, 사용후핵연료 저장, 동맹 제도, 국제협력, 인력과 정비체계를 하나의 연속된 국가전략으로 묶어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특히 핵추진잠수함의 경우 건조 이후의 운용능력까지 준비해야 실제 전력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업의 평가 기준도 '몇 척을 만들었는가'에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가'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임광복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ac@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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