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열사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학생이었다. 학창시절 그는 학업성적이 뛰어났지만 공부벌레는 아니었다. 시와 글쓰기를 취미로 하는,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 이 열사는 글을 통해 자신을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필요한 순간엔 언제나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이 열사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다. 결의대회에 참석한 그는 앞장서서 군부정권의 민주주의 탄압에 분노를 표했다. 결의대회를 마친 1000여 명의 학생들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물론 이 열사도 함께였다.
시위가 계속 되자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계속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 열사는 뒷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 열사는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학우의 부축을 받아 시위현장을 빠져나왔다. 이 장면을 로이터 통신 기자가 촬영해 보도하면서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22살 어린나이의 학생을 향해 최루탄을 쏜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화가 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33개 도시에서 약 100만 명의 시민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6월 항쟁’이라 불리는 전국적 시위로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 약속을 받아냈다. 이것이 ‘6·29선언’이다.
사망 나흘 뒤 그가 광주로 향하는 길에는 160만 국민이 함께 슬퍼했다.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망월동 5·18 묘지에 안치됐다. 이한열 열사는 사망 후 14년이 지난 2001년,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돼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이후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가 정부에서 받은 배상금과 국민들의 성금으로 2004년 '이한열 기념관'을 세웠고, 2014년 사립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박물관에는 이한열 열사가 쓰러질 당시 입고있던 옷가지와 그가 사용했던 물품 등이 전시돼 있다.
6월이 되면서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오는 주말에는 6월보다 더 뜨거웠을 이한열 열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떠올리며,이한열 기념관을 방문해보는 건 어떨까?
백승재 기자 tequiro0713@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