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자경단이란 본래 공권력이 부재하거나 치안이 붕괴된 무법지대에서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총을 들고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결성한 민간 무장 조직을 가리킨다. 금융시장의 채권 자경단 역시 본질적으로 동일한 원리로 움직인다.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이 표를 얻기 위해 무책임한 감세와 선심성 돈 풀기로 나랏빚을 마구잡이로 늘릴 때, 그리고 통화 가치를 보위해야 할 중앙은행이 정치적 외풍에 흔들려 인플레이션을 제때 통제하지 못할 조짐이 보일 때, 채권 투자자들은 수수방관하지 않고 자본의 총을 꺼내 든다.
그들이 구사하는 전술은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이다. 보유하고 있던 국채를 시장에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며 내던지는 것이다. 시장에 국채 매도 물량이 홍수처럼 쏟아지면 채권 가격은 폭락하고,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국채금리는 천정을 뚫고 치솟는다. 금리가 폭등하면 정부는 빚을 내어 예산을 집행하려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조달 비용 때문에 국정 운영 자체가 마비된다. 결국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정부라 할지라도 치솟는 이자 폭탄을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게 된다. 무분별한 씀씀이를 줄이고 빚을 줄이겠다고 시장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선거로 선출된 권력이 망가뜨린 재정의 규율을, 시장의 자본이 금리라는 냉엄한 회초리를 들어 강제로 바로잡는 현상, 이것이 바로 채권 자경단의 역사적 실체다.
채권 자경단이라는 개념을 1983년 월가의 저명한 이코노미스트 에드 야데니(Ed Yardeni)가 처음 제시했을 때만 해도 이는 금융시장의 비유적 표현에 가까웠다. 당시 폴 볼커 연준 의장의 가혹한 고금리 충격 이후에도 정부의 방만한 재정 적자가 이어지자, 채권 투자자들이 금리를 끌어올려 정책 당국을 압박하던 모습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채권 자경단이 백악관의 최고 권력마저 단숨에 굴복시키며 전 세계 금융사의 판도를 뒤흔든 결정적인 사건은 1990년대 초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일어났다.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대규모 재정 지출 계획을 가동하려 했다. 전 국민 건강보험 도입을 골자로 한 의료 개혁과 대규모 공공 인프라 투자 등 정부가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는 야심 찬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서민들의 표심을 사로잡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청사진이었지만, 월가 채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가뜩이나 누적된 재정 적자 상태에서 또다시 천문학적인 빚을 내어 공약을 밀어붙인다면 미국의 국가 부채는 걷잡을 수 없이 폭증하고 인플레이션이 다시 불붙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채권 자경단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국채금리가 8%까지 치솟자 미국 경제 전반에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모기지 금리가 수직 상승하면서 주택 시장이 얼어붙었고, 기업들은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투자를 전면 철회했다. 주식 시장은 연일 곤두박질쳤고, 무엇보다 연방정부가 감당해야 할 국채 이자 비용이 폭증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모든 개혁 공약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백악관 수석 정치 전략가로 클린턴의 대선 승리를 일궈냈던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은 채권 자경단의 무자비한 위력 앞에 기가 질려 역사에 길이 남을 탄식을 내뱉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교황이나 대통령이 아닌 채권자경단으로 태어나고 싶다." 클린턴 대통령은 야심 차게 준비했던 복지 확대와 대규모 공공 지출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그리고는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로버트 루빈을 재무장관으로 기용하여 정부 지출을 가혹하게 줄이고 균형 재정을 달성하는 뼈아픈 재정 긴축 정책, 이른바 ‘루비노믹스(Rubinomics)’로 국정 기조를 180도 선회했다.
워싱턴 정가가 백기를 들고 허리띠를 졸라매자 그제야 채권 자경단은 국채 매도를 멈추고 총을 거두었다. 8%를 넘나들던 국채금리는 서서히 꺾여 하향 안정세를 찾았다. 그리고 이 금리 안정이 토대가 되어 미국 정부는 1990년대 후반 역사상 유례없는 재정 흑자를 달성했고, 뉴욕증시는 기술 혁명과 맞물려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골디락스 대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정치 권력이 시장의 규율 앞에 승복하고 빚을 통제했을 때 비로소 경제의 진정한 봄날이 찾아왔던 것이다.
오늘날 미국 경제가 마주한 현실은 그때 보다 더 엄중하다. 국가 채무는 이미 40조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120%를 상회하고 있다. 1년에 미국 연방정부가 순수하게 국채 이자를 갚기 위해 지출하는 돈만 해도 1조 달러를 넘었다. 국방비 예산보다 더 많다. 매달 천문학적인 규모의 신규 국채가 시장에 쏟아져 나오지만, 이를 과거처럼 흔쾌히 받아줄 큰손들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수년간 양적완화를 통해 국채를 무제한으로 사들여주던 연방준비제도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대차대조표를 축소하는 양적긴축(QT)을 이어왔고, 미 국채의 핵심 외국인 매수 주체였던 중국과 일본 등 해외 중앙은행들 역시 탈달러화 흐름과 자국 통화 방어, 지정학적 갈등 속에 미 국채 매입 여력을 현저히 축소했다.
연방정부가 쏟아내는 막대한 빚더미를 오롯이 민간 투자자들이 떠안아야 하는 수급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여기에 탈세계화, 공급망 재편, 에너지 전환 비용 등 구조적인 물가 상승 요인들이 겹치면서 투자자들은 장기 채권을 보유하는 대가로 더 높은 프리미엄, 즉 ‘기간 프리미엄(Term Premium)’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의 빚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는데 이를 사줄 사람은 줄어들고 미래의 화폐 가치는 불안하니, 채권 자경단이 다시 국채를 내던지며 금리를 밀어 올리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채권자경단의 투매는 책임한 재정 팽창과 화폐 가치 훼손에 대한 시장의 거부권 행사다.
중앙은행이 단기 기준금리를 조금 조정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채권 자경단이 정부의 빚더미에 분노하여 장기 국채를 내던지는 한, 실물경제의 뼈대를 이루는 10년물, 30년물 장기 시장금리는 꺾이지 않는다. 오히려 중앙은행이 설익은 완화 조치로 인플레이션 통제에 대한 불신을 자초한다면, 채권 자경단은 더 거칠게 국채를 매도하여 장기 금리를 더 높이 밀어 올리는 역설을 만들어낼 뿐이다.
채권 자경단이 총을 내려놓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정치권이 빚잔치의 환상에서 깨어나 재정 규율을 회복하는 것 뿐이다. 정부가 뼈를 깎는 지출 구조조정과 건전 재정에 대한 확고한 실행 의지를 보여주어 시장의 신뢰를 되찾을 때, 치솟던 국채금리는 비로소 안정을 찾고 경제의 모든 주체들은 비로소 금융 비용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