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카라 정상회의서 패트리엇 생산 허가…유럽 압박 속 젤렌스키엔 이례적 우호 발언
이미지 확대보기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예상 밖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불안해하던 유럽 동맹국들이 일단 안도했다.
유럽 주둔 미군 철수와 그린란드 통제권, 이란 전쟁 지원 문제를 놓고 거친 발언을 쏟아냈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는 패트리엇 방공 미사일 생산 허가라는 중대한 지원 카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8일(현지시각)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가 동맹 간 갈등으로 흐를 수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우크라이나 입장 변화로 유럽 정상들이 조심스러운 낙관론을 갖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번 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 동맹국을 향한 불만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유럽 방위비 지출이 낮다고 비판했고, 일부 국가가 미국의 이란 공격에 영공과 기지를 제공하지 않았다며 반발했다. 스페인과 영국, 독일, 이탈리아를 향한 비난도 공개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회의의 결정적 장면은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산 패트리엇 지대공 요격미사일을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라이선스를 주겠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탄도미사일 공격에 시달려온 우크라이나에는 방공 능력을 중장기적으로 키울 수 있는 핵심 조치다.
◇ “우크라이나, 최근 이기기 시작했다”
유럽 외교가가 주목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어조 변화다. 한 나토 외교관은 FT와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승자를 좋아한다”며 “우크라이나는 최근 이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는 지난해 2월 백악관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충돌했을 때 우크라이나가 감사할 줄 모른다며 거칠게 몰아붙였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가진 패가 없다”고 말해 양국 관계에 큰 균열을 냈다.
앙카라 회담 분위기는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 옆에서 “백악관 회동 때와 지금을 생각하면 믿기 어렵다”며 “우리는 매우 좋은 관계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 “많은 미래가 있다”고도 했다.
유럽 대표단은 이 발언을 단순한 외교적 수사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보다 우크라이나에 더 우호적인 신호를 공개적으로 낸 것은, 향후 미국의 대우크라이나 지원 기조가 다시 강화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혔다.
◇ 패트리엇 생산 허가가 핵심
가장 실질적인 변화는 패트리엇 생산 라이선스다. 패트리엇은 러시아의 탄도미사일과 공습을 막는 데 우크라이나가 가장 절실하게 요구해온 방공체계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패트리엇을 만들 권리를 주고, 생산 방법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이를 상당히 빠르게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면 러시아의 장거리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이 제공하는 제한된 방공체계에 의존해왔다. 생산 능력을 확보하면 장기전에서 방공망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채텀하우스 러시아·유라시아 프로그램의 오리시아 루체비치 부소장은 FT에 패트리엇 라이선스가 우크라이나에 주어질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의 탄도미사일 위협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군사 역량에 대규모로 접근하는 것이 러시아를 진정으로 두렵게 하는 요소라고 설명했다.
다만 실제 생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기술 이전, 미국 방산업체 협조, 생산시설 보호, 부품 공급망 확보가 모두 필요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군수 생산시설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라이선스 부여는 미국의 지원 방식이 단순 무기 제공에서 생산 역량 이전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뜻한다.
◇ 푸틴 압박 카드로 해석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 변화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압박하려는 전략으로도 해석된다. FT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 당국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최근 전장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루체비치 부소장은 푸틴 대통령이 좋은 합의를 거부했고, 우크라이나의 중장거리 드론 기술 우위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는 점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푸틴 대통령을 많이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전쟁 종식 조건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러시아가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역량 강화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더 강해질수록 러시아가 전쟁을 계속 끌고 가기 어려워지고, 협상장으로 돌아올 유인이 커진다는 계산이다.
유럽 당국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을 회의장 안에서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한 당국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실내에서는 품위 있고 진지했다”고 평가했다.
◇ 유럽 겨냥한 불만은 여전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에 대한 기존 불만을 접은 것은 아니다. 그는 앙카라 도착 직후부터 유럽 동맹국을 향해 강한 압박을 이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유럽에서 미군을 모두 철수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린란드는 덴마크가 아니라 미국이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꺼냈다.
나토 정상들과의 회의에서도 스페인을 “끔찍한 파트너”라고 비난했고, 이란 전쟁에 충분히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국, 독일, 이탈리아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유럽 정상들에게 이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랫동안 나토 동맹국의 방위비 지출이 부족하다고 비판해왔다. 유럽 지도자들은 그의 위협과 과격한 표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공개 충돌을 피하는 방식도 익혀왔다.
하지만 이란 전쟁과 중동 긴장이 겹친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동맹국들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상선 공격을 감행했다며 추가 공습을 단행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과 이란의 휴전이 끝났다고 말했다.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충격과 확전 위험 때문에 이란 전쟁에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동맹국의 협조 부족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회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수 있었다.
◇ 뤼터·에르도안이 분위기 완화
회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며 누그러졌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이 동맹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찬사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전해졌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분위기 완화에 힘을 보탰다. FT에 따르면 그는 32개국 정상들의 비공개 회의에서 참석자들에게 각자 이름이 새겨진 권총과 실탄을 선물했다. 다소 기이한 장면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회의 뒤 방 안에 “엄청난 사랑”이 있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은 유럽 정상들에게도 회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여지를 줬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폐막 발언에서 “사랑의 느낌”을 언급한 데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회의장 안에 훌륭한 정신과 단합이 있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평가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유럽 지도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거친 발언보다 우크라이나 지원 신호에 더 무게를 두기로 한 셈이다. 나토 내부에서 실제 전략적 의미가 있는 변화는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 그리고 패트리엇 생산 허가였기 때문이다.
◇ 나토 안도, 그러나 신중론도
유럽 동맹국들의 안도는 아직 조심스럽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노선은 예측하기 어렵고, 우크라이나 지원 강화가 실제로 얼마나 지속될지도 불확실하다.
패트리엇 생산 라이선스는 우크라이나에 큰 성과지만, 즉각적인 방공 공백을 메우는 조치는 아니다. 생산 체계 구축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미국 방산업체와 의회, 유럽 파트너들의 협력도 뒤따라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같은 회의에서 유럽 주둔 미군 철수와 그린란드 통제권을 언급했다는 점도 나토의 근본적 불안을 없애지는 못한다. 유럽은 여전히 미국 안보 보장에 의존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 보장을 협상 카드처럼 다뤄왔다.
그럼에도 이번 앙카라 회의는 유럽 동맹국들에 예상보다 나은 결과를 안겼다. 가장 우려했던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다시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우크라이나 지원 축소를 시사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는 반대의 장면이 연출됐다.
◇ 트럼프 외교의 새 시험대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선회는 미국 외교정책의 중요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유럽 동맹에 방위비와 정치적 양보를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방공 능력 강화를 약속했다.
이 접근은 전통적인 동맹 관리 방식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압박과 칭찬, 위협과 지원을 동시에 사용한다. 나토 동맹국 입장에서는 불안정하지만, 그가 우크라이나에 실질적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방공 생산 능력을 확보하면 러시아는 장기 미사일 공세의 효과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 미국의 군사기술 이전이 확대되면 러시아가 협상에 나설 압박도 커질 수 있다.
다만 러시아가 이를 확전 신호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패트리엇 생산 시설과 군수공장이 러시아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될 수 있고, 미국과 러시아 간 긴장도 더 높아질 수 있다.
◇ 불안한 동맹에 일단 숨통
앙카라 정상회의는 처음에는 나토 내부 갈등이 폭발할 수 있는 자리로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을 압박했고, 이란 전쟁은 동맹국들을 갈라놓았으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컸다.
그러나 회의의 결말은 예상과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였고, 우크라이나의 패트리엇 생산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유럽 지도자들은 그의 다른 발언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우크라이나 관련 변화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실제 정책 전환으로 굳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번 회의는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약화될 것이라는 유럽의 최악의 우려를 일단 누그러뜨렸다.
나토 동맹국들은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다음 발언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앙카라에서 나온 메시지만 놓고 보면,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추가 지원 가능성을 얻었고 유럽은 미국이 완전히 돌아서지 않았다는 신호를 받았다. 불안한 동맹에 적어도 당장의 숨통은 트인 셈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