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농축 우라늄 25% 여전히 러시아 의존… "싼 가격이 만든 치명적 덫"
오라노·유렌코 수조원 투자해 증설 나서지만… "빨라야 2032년 가동"
美·유럽 "정치적 결단 없으면 AI 시대 원전 르네상스는 불가능"
오라노·유렌코 수조원 투자해 증설 나서지만… "빨라야 2032년 가동"
美·유럽 "정치적 결단 없으면 AI 시대 원전 르네상스는 불가능"
이미지 확대보기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현지시각) 서방의 주요 핵연료 기업 경영진과 전문가 분석을 인용해, 유럽이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여전히 대륙 전체 수요의 4분의 1을 러시아에 의존하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희토류 사태와 판박이"… 끊을 수 없는 ‘러시아산’의 유혹
유럽과 미국의 원전 운영사들이 러시아산 우라늄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격’과 ‘공급 능력’이다.
프랑스 국영 원자력 기업 오라노(Orano)의 니콜라스 마에스 최고경영자(CEO)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상황은 중국산 희토류 의존도와 매우 흡사하다”고 짚었다. 풍력 터빈이나 전기차에 필수인 희토류를 중국이 장악한 것처럼, 원전 연료 시장도 러시아가 쥐고 흔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러시아 의존도를 어느 수준까지 용인할지는 결국 정치인들이 결정할 몫”이라고 꼬집었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러시아 국영 원전 기업 로사톰은 전 세계 우라늄 농축 용량의 약 44%를 장악하고 있다. 농축 우라늄은 채굴한 우라늄을 가스로 변환한 뒤 고속 원심분리기에서 우라늄-235 동위원소 비율을 높여 만든다. 고도의 기술과 설비 투자가 필요한 이 공정에서 러시아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실제 데이터는 서방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를 보면 미국 원전 업계는 지난 5년(2020~2024년)간 꾸준히 전체 농축 서비스 구매량의 20%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해 왔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2024년 러시아산 우라늄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2028년까지 예외를 허용하는 유예 기간을 둔 탓에 의존도는 쉽사리 꺾이지 않고 있다.
유럽 상황은 더 심각하다. 유럽연합 통계국(Eurostat) 집계 결과,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듬해인 2023년 EU의 러시아산 핵연료 수입액은 오히려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이 옛 소련 시절 설계된 ‘VVER 원자로’를 가동하기 위해 러시아산 연료봉을 대거 사재기했기 때문이다. 2024년 수입액이 다소 줄었지만, 전쟁 이전 수준을 웃돌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서방의 뒤늦은 각성, 그러나 ‘시간차’가 문제
서방 핵연료 기업들도 대응에 나섰다. 서방 양대 우라늄 농축 기업인 유렌코(Urenco)와 오라노는 최근 설비 증설을 서두르고 있다. 오라노는 프랑스 남부 트리카스탱(Tricastin) 시설 확장에 17억 유로(약 2조9200억 원)를 투입해 생산 능력을 30% 늘릴 계획이다. 미국 테네시주에도 2032년 가동을 목표로 50억 유로(약 8조6000억 원) 규모의 농축 시설을 짓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원심분리기 등 농축 시설을 확충해 실제 생산에 들어가기까지는 수년이 걸린다. 오라노와 유렌코가 계획한 500만 SWU(농축서비스단위) 규모의 신규 설비는 2032년이 지나야 온전히 가동된다.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의 테바 메이어 연구원은 “만약 2032년 이전에 유럽이나 북미에서 신규 원전 프로젝트가 구체화된다면, 서방의 자체 공급 능력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 등을 이유로 원전 수요가 폭증하는 ‘원전 르네상스’가 도래하면 공급 부족 사태는 더 심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국 기업들이 2028년 전면 금수 조치에 대비해 오라노와 유렌코의 향후 생산 물량을 이미 선계약해버린 점도 유럽에는 악재다. 마에스 CEO는 “계획된 신규 공급 물량의 상당 부분을 미국 기업들이 이미 사갔다”며 “유럽이 수입 금지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향후 수십 년간 러시아산 연료에 의존해야 할 처지”라고 경고했다.
정치 셈법에 발목 잡힌 ‘탈(脫)러시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5월 러시아산 핵연료 금수 조치를 제안하겠다고 밝혔으나, 내부 정치 싸움 탓에 진척이 없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등 친러 성향이거나 러시아 원전 기술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반대하고 있어서다.
일부 국가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와의 관계가 정상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장기적인 서방 기업과의 계약을 꺼리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러시아산이 서방 기업 제품보다 가격 경쟁력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보리스 슈흐트 유렌코 CEO는 “우리는 낡은 설비를 교체하고 투자를 늘려야 하는데, 정치가들이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고 있다”며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한 신호가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단기 제재 상황만 보고 수조 원 단위의 장기 투자를 집행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이다.
브뤼겔 연구소의 벤 맥윌리엄스 분석가는 “러시아 의존도는 여전히 높고 교역 규모도 상당하다”며 “시장에 나가서 다른 공급처를 바로 찾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대체 능력을 갖추는 데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서방 세계가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고 푸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제재를 넘어선, 구체적인 대체 공급망 확보 전략과 회원국 간의 정치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2032년이라는 물리적 데드라인까지, 서방의 원자력 발전소는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