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글로벌이코노믹 로고 검색
검색버튼

트럼프 3500억 달러 '현금 선불' 고집에 韓 외환위기 우려 나와

"외환보유액 85% 투입 불가"…中, 한화오션 제재로 '양면 압박' 가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한국이 미국의 대규모 현금 투자 요구와 중국의 경제 보복 사이에 전례 없는 양자택일 압박에 직면했다.
뉴욕타임스가 27(현지시각)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3500억 달러(5008800억 원) 규모의 한국 투자를 '현금 선불' 방식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에 '워싱턴 편을 들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미·중 사이에서 극심한 경영 불확실성에 노출됐다.

트럼프, 3500억 달러 '선불 투자' 압박


한미 양국은 지난 731일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대가로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기로 잠정 합의했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6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투자 방식, 투자 규모, 시간표, 손실과 배당 분배 방식 등 모든 주요 쟁점이 여전히 걸림돌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가장 큰 쟁점은 투자 방식이다. 한국 정부는 대출, 보증, 지분 투자 등 다양한 형태의 분산 투자를 제안했지만, 미국은 일본과 유사한 조건의 '현금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차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는 선불이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문제는 3500억 달러가 한국 외환보유액 4220억 달러(9월 말 기준, 605조 원)의 약 83%에 달한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연간 약 200억 달러(286200억 원)까지만 외환시장 안정을 해치지 않고 투입할 수 있다고 추산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국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통화스와프 없이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면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금융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원화는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2%의 비중만 차지하고 있어, 대규모 자금의 달러 전환 시 원화 가치 급락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지난달 원-달러 환율은 1410원대까지 떨어졌으며, 시장 전문가들은 3500억 달러 투자 시 환율이 1430원 이상으로 치솟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일본과 근본적으로 다른 여건이다.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3000억 달러(18606900억 원)로 한국의 3배가 넘고, 엔화는 글로벌 외환시장 점유율이 17%에 달해 기축통화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한국은 미국에 연방준비제도와의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요청했지만,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오는 29일 경주에서 열리는 이재명-트럼프 정상회담에서 협상 타결 가능성에 대해 한국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7"협상 흐름을 봤을 때 이 시점에서 즉각 타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밝혔다.

중국, 한화오션 미국 자회사 5곳 제재 단행


미중 갈등의 한가운데서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보복 조치에도 노출됐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14일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에 대한 전면 제재를 발표했다. 제재 대상은 한화쉬핑, 한화필리조선소, 한화오션USA인터내셔널, 한화쉬핑홀딩스, HS USA홀딩스 등이다.

중국 측은 이들 기업이 미국 정부의 중국 조선업 조사에 협조했다며 "중국의 주권과 안보, 발전 이익을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1억 달러(1430억 원)에 인수했으며,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인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의 핵심 파트너로 떠올랐다.

이번 제재로 한화오션 주가는 한때 9%까지 급락했으나 시간을 두고 실적을 기반으로 반등했다. 한 증권사에서는 한화오션의 미국 사업은 중국 기업들과 연계가 제한적이며, 현재 건조 중인 선박들은 소형이고 원양 운항용이 아니어서 즉각적 영향은 최소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중장기적 영향에 대한 우려는 지속되고 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석종건 방위사업청장은 지난 21"향후 1~2년간 최대 6000만 달러(859억 원)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필리조선소가 미국 밖에서 필요한 자재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MASGA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한화오션도 지난 26일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중국 제재로 필리조선소의 매출 전망에 지속적인 변동성이 예상된다"고 인정했다.

한화오션은 산둥 기반 조선소에서 모듈을 제작해 한국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생산해왔는데, 이번 제재로 이러한 공급망이 차단되면서 미국 조선 방산 계약 이행에 차질이 우려된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중국 제재로 인한 변동성이 존재하지만,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각적 대응책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지난 7월과 8월 사설을 통해 한국의 대미 조선 투자를 "지정학이 경제 원칙을 넘어설 수 있다고 가정하는 고위험 도박"이라며 한국 국기를 단 선박이 미국 군사행동에 참여할 경우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22일 리청강 중국 상무부 부부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제재의 조속한 철회를 요청했다.

삼성·SK하이닉스, 미중 기술패권 최전선 직격탄 우려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이중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은 지난 8월 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대한 수출 면제 조치를 철회하고, 미국산 반도체 장비 반입 시 개별 허가를 받도록 했다.

SK하이닉스는 전체 DRAM 생산량의 약 40%를 중국 우시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자회사 솔리다임을 통해 NAND 플래시 물량의 약 20%를 중국 다롄공장에서 생산한다. 삼성전자는 시안공장에서 글로벌 NAND 플래시 생산량의 약 35%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 증권사의 한 분석가는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신규 생산라인과 공정을 한국에서 설계해왔고 중국 기존 시설은 그대로 유지해왔다""즉각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미국산 장비를 적시에 확보하지 못하면 두 기업이 중국 장비업체와의 협력을 강화해 중국 내 생산을 안정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브루킹스연구소 관계자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한국이 예상하지 못한 압박 지점이었다""한국은 이제 더 이상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논리를 유지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7일 말레이시아에서 일본으로 이동하는 에어포스원 기내에서 기자들에게 "시진핑 주석을 매우 존경하며 우리는 합의에 도달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나는 시 주석을 매우 좋아하고 그도 나를 매우 좋아한다"며 낙관적 전망을 내놨다.

오는 30일 경주에서 열리는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은 양국 무역전쟁 완화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회담 의제에는 관세 인하, 희토류 수출 통제 연기, 미국 대두 및 농산물 구매, 보잉 항공기 구매, 펜타닐 대응, 반도체 수출 통제, 조선업 협력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기업들은 이번 회담 결과에 따라 미중 사이에서 극심한 공급망 압박이 다소 완화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맨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