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생태계에서 엔비디아 보다도 더 무서운 기업이 있다. 엔비디아가 쩔쩔매는 이 기업의 이름은 뜻밖에도 아지노모도(味の素)다. 일본의 조미료 업체다. 아지나모도가 없었다면 엔비디아가 자랑하는 최첨단 인공지능(AI) 가속기, TSMC와 삼성전자가 수십조 원을 투입해 생산하는 초미세 반도체, 그리고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두뇌 역할을 하는 고성능 중앙처리장치(CPU)도 빛을 내기 여려웠을 것이다. 아지나모도는 이 모든 최첨단 부품을 제조하는 공정에서 대체 불가능한 '슈퍼 을(乙)'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식탁 위 국물 맛을 내던 조미료 제조사가 어떠한 연유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심장부를 장악하게 되었을까? 사건의 출발점은 1908년 일본 도쿄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도쿄 제국대학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 교수는 저녁 식탁에서 아내가 끓여준 다시마 국물을 마시던 중 강한 호기심을 품었다.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의 4대 기본 맛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깊고 풍부한 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그는 즉시 연구실에서 수십 킬로그램의 다시마를 끓이고 증발시키는 집요한 추출 실험에 돌입했다.
그 결과 감칠맛의 정체가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일종인 '글루탐산'이라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규명해 냈다. 그는 이 새로운 감각에 '우마미(旨味·감칠맛)'라는 이름을 붙였고, 음식을 조리할 때 간편하게 첨가할 수 있도록 분말 형태의 나트륨염(MSG)으로 결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1909년 설립된 아지노모도는 이 기적의 가루를 본격적으로 상업화했다. 국물 요리에 한 숟가락만 넣으면 맛의 풍미가 극대화되는 마법 같은 효능 덕분에 아지노모도는 순식간에 일본을 넘어 아시아 전역을 휩쓰는 거대 식품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버려지던 부산물, 화학의 불씨를 당기다
조미료 제조 공정의 이면에는 구조적 고민이 뒤따랐다. 사탕수수를 미생물로 발효시켜 대량의 글루탐산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화학적 부산물이 필연적으로 쏟아져 나온 까닭이다.대다수 기업이라면 폐기물로 처리했을 이 잔여 물질을 두고 아지노모도의 화학 연구진은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조미료의 원천인 아미노산 역시 특수한 고분자 유기화합물이다. 분자 구조를 정밀하게 변형하면 플라스틱 수지나 접착제, 특수 절연 소재로도 확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실제로 아미노산 화합물은 전기가 통하지 않게 차단하는 절연성(絶緣性)이 탁월하고 열 안정성이 뛰어났다. 회사 경영진은 본업인 식품 사업의 그늘 아래 연구원들에게 장기적인 자율성을 부여했고, 연구실 한구석에서는 수십 년간 맛과 무관한 특수 에폭시 수지 복합체 연구가 묵묵히 이어졌다. 이 조용한 기초 연구가 훗날 인공지능 시대를 견인할 원천기술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반도체 패키징의 벽, 액체 도포의 한계
시간이 흘러 1990년대 중반, 개인용 컴퓨터(PC)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인텔을 필두로 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연산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그러나 집적도가 높아지자 예기치 못한 물리적 난관이 발생했다.초미세 실리콘 칩은 그 자체만으로 메인보드와 직접 소통할 수 없다. 칩과 메인보드 사이의 전극 간격을 완충하고 신호를 분배하는 교량 역할을 하는 얇은 기판, 즉 '패키지 기판(FC-BGA)' 위에 얹혀야만 한다.
기판 내부에는 머리카락보다 수십 배 가는 구리 미세 회로가 10층, 20층씩 아파트처럼 고밀도로 적층된다. 회로 간의 간격이 극도로 좁아진 탓에, 층과 층 사이를 완벽하게 분리해 누전과 신호 간섭을 차단하는 고성능 절연 소재가 필수적이었다.당시 업계는 액체 상태의 절연 수지를 표면에 페인트처럼 펴 바른 뒤 열로 건조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로가 미세화되자 한계가 명백해졌다. 액체를 바르는 공정 특성상 표면 두께가 울퉁불퉁해지기 일쑤였고, 기포가 발생해 미세한 틈이 생기거나 고온 환경에서 기판이 뒤틀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속출했다.
액체 도포 방식으로는 차세대 고성능 CPU를 도저히 양산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반도체 업계는 스마트폰 액정보호필름처럼 얇고 균일하게 밀착되는 고체 필름 형태의 혁신적인 절연재를 필사적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조미료 연구실에서 탄생한 'ABF'의 충격
그 해답은 첨단 반도체 기업이 아닌 식품 회사의 화학 실험실에서 나왔다. 아지노모도의 한 연구원이 업계의 고민을 접하고 자사의 아미노산 수지 연구를 응용할 가능성을 포착한 것이다.아지노모도는 특수 에폭시 수지에 무기물 필러를 정밀 배합하여, 극도로 얇으면서도 균일한 필름 형태의 절연 소재를 구현해 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반도체 업계를 지탱하는 '아지노모도 빌드업 필름(ABF, Ajinomoto Build-up Film)'이다.
ABF는 반도체 제조 공정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ABF는 롤러로 압착하는 고체 필름 형태였기에 1마이크로미터 단위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균일한 두께를 유지했다. 레이저를 이용해 초미세 비아 홀(Via Hole, 층간 연결 구멍)을 뚫어도 찢어지거나 녹아내리지 않는 우수한 가공성을 지녔다. ABF는 또 고성능 프로세서가 뿜어내는 가혹한 고열 속에서도 열팽창계수가 극히 낮아 기판의 휨 현상을 획기적으로 억제했다.
인텔을 비롯한 유수의 반도체 제조사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글로벌 화학 공룡 기업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를 조미료 회사가 단숨에 돌파한 셈이었다. 인텔은 지체 없이 ABF를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의 글로벌 표준 소재로 전격 채택했다.
AI 혁명과 삼성전기, 그리고 독점의 힘
오늘날 챗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을 구동하는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기판은 손바닥만 한 면적에 수십 겹의 고다층 회로가 얽혀 있다. 기판 낱장 가격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초고부가 시장이다.놀라운 점은 이 하이엔드 FC-BGA 기판 절연 필름 시장에서 아지노모도의 점유율이 95% 이상,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전기, 일본 이비덴과 신코덴키, 대만 유니마이크론 등 글로벌 유수의 기판 제조사들은 단 한 곳도 예외 없이 아지노모도의 필름을 핵심 원자재로 사용한다. 최근 국내 증권가에서 삼성전기의 목표주가를 파격적으로 상향 조정한 핵심 동력 역시 FC-BGA 사업의 폭발적 성장이었으며, 그 공급망의 최정점에는 변함없이 아지노모도가 군림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대체재 개발에 뛰어들었으나 번번이 장벽에 가로막혔다. 30년 넘게 축적된 미세 원료 배합 비율과 열처리 공정의 노하우는 단순한 화학적 역설계로는 복제할 수 없는 '산업적 비법'의 영역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장인정신과 융합이 일군 기적
식탁 위의 감칠맛을 찾으려 했던 한 과학자의 소박한 탐구심, 그리고 버려지던 제조 부산물을 놓치지 않고 수십 년간 파고들었던 끈질긴 연구 개발.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이종(異種) 산업 간의 경계를 과감히 넘나든 아지노모도의 궤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시사점을 던진다. 인류의 지적 지평을 넓히고 있는 최첨단 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심장부 한가운데, 100년 전 식탁의 풍미를 돋우던 조미료 회사의 유산이 가장 얇고 단단한 필름의 형태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