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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종전(終戰)은 복귀가 아니다…신(新)에너지 질서의 설계자로 나서야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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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군사적 갈등이 봉합되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과거의 안정된 질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유가가 안정되고 천연가스 공급이 숨통을 트이면 전쟁 이전의 평화로운 시장이 복원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종전은 결코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다. 군사적 충돌의 포성이 멈추더라도 제재와 불신, 공급망과 해상 항로를 둘러싼 패권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 기간 고착화된 새로운 에너지 블록화가 공식적인 규범으로 굳어지는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에너지 안보의 개념이 화석연료의 단순 공급을 넘어 전력망, 핵심광물, 해운망과 기후재난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2030년까지 세계 LNG 수출 능력이 약 3000억㎥ 증가하고 그 절반을 미국이 주도하면서, 세계 가스 시장은 고정된 파이프라인 거래에서 유연하고 다변화된 해상 LNG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새로운 지형의 첫 번째 축은 '러시아 에너지의 귀환'이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유럽이 과거 수준으로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PNG)에 빗장을 풀 가능성은 희박하다. 유럽은 이미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LNG 수입 터미널을 확충했고, 에너지를 치명적인 안보 무기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 에너지는 유럽이 아닌 중국, 인도, 동북아시아로 향하며 '아시아 중심의 재배치'를 가속할 것이다.

두 번째 축은 '중동의 구조적 위험 프리미엄'이다.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이 재개되더라도, 선사와 글로벌 재보험사는 분쟁 재발 위험을 운임과 보험료에 구조적으로 반영할 것이다. 에너지는 지하에 매장되어 있다고 즉각 시장에 유통되는 상품이 아니다. 제재 해제, 금융 결제 승인, 선박 보험과 해운망이 온전히 연결되어야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 서방 제재가 장기화된 베네수엘라의 생산 복구가 더딘 이유이자, 미국이 캐나다·알래스카·베네수엘라를 묶는 '서반구 에너지 공급망' 구축에 공을 들이는 배경이다.

이러한 재편 구도에서 알래스카 LNG와 북극항로의 전략적 가치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알래스카 북부 가스를 1300㎞의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해 연 2000만t 규모를 수출하려는 알래스카 프로젝트는 중동 의존도를 낮추고 수송 거리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고비용 구조와 장기 인수의무는 면밀히 따져봐야 하지만, 지정학적 완충재로서의 가치까지 단기 가격 논리로만 외면해서는 안 된다. 북극항로 역시 마찬가지다. 기상이변과 쇄빙선, 제재 리스크 탓에 수에즈운하를 전면 대체할 수는 없겠으나, 유라시아와 북미의 자원이 동북아에서 교차하는 '전략적 보완 회랑'으로서의 잠재력은 뚜렷하다.

한국은 단순히 자원 수입국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 복수의 해상 회랑을 구축해야 한다. 중동–인도양, 북미–태평양, 북극–동해를 잇는 3각 축을 확보하는 공급망 다변화가 필수적이다. 특히 알래스카 LNG와 같은 대형 사업은 단순 가스 구매 계약에 그치지 않고, 국내 조선·해양플랜트·쇄빙선 수주와 결합한 '산업 패키지' 협상으로 부가가치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 중심에 울산이 있다. 대규모 항만과 석유화학, 조선, 발전 인프라가 집약된 울산은 알래스카 LNG, 중동산 청정 암모니아, 북극항로 연계 에너지를 집하·저장·전환해 동해안 산업벨트로 공급하는 최적의 입지다. 특정 에너지의 단순 종착지가 아니라, 다양한 공급망이 교차하고 리스크를 흡수하는 '동북아 완충 허브'로 기능할 수 있다.

완충 허브가 제 기능을 하려면 하드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보세구역 내 가스·유류 블렌딩 규제를 풀고 금융·세제 특례를 더해 글로벌 트레이더를 끌어들여야 한다. 나아가 울산 인도 기준의 가격지표를 구축해 동북아 에너지 시장의 룰메이커로 서야 비로소 진정한 안보 방벽이 완성된다.

러시아와 유럽의 사례가 여실히 증명하듯, 경제적 상호의존만으로는 지정학적 갈등을 막아내지 못한다. 신뢰가 붕괴하면 가장 효율적이었던 공급망이 가장 치명적인 안보의 약점으로 돌변한다. 전쟁이 끝나도 자원 패권의 파고는 결코 낮아지지 않는다. 한국은 이제 남이 열어놓은 뱃길에서 자원을 사오는 수동적 구매자를 넘어, 공급원과 항로, 첨단 산업과 기술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신(新)에너지 질서의 설계자'로 도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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