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 전 고려대 교수
인공지능 시대에도 하드웨어 인프라는 여전히 중요하다. 인류 문명사를 뒤바꾸는 대전환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인프라의 지배자’가 존재했다. 19세기 골드러시 시대에 정작 막대한 부를 거머쥔 주역이 금을 캐던 광부가 아니라 청바지와 곡괭이를 공급한 상인이었듯, 21세기 생성형 인공지능(AI) 혁명의 대서사시에서도 동일한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엔비디아가 설계한 최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오픈AI가 쏘아 올린 초거대언어모델(LLM)에 열광하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 칩이 존재한다 한들, 이를 수만 개 단위로 묶어 초고속으로 통신시키고 막대한 전력과 살인적인 발열을 완벽히 제어해 내는 ‘물리적 실체’, 즉 하드웨어 인프라 시스템이 없다면 인공지능은 한낱 소프트웨어 코드 조각에 불과하다.
이 거대한 AI 생태계의 최전선에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와 글로벌 엔터프라이즈 기업들을 호령하는 절대강자가 있다. 바로 마이클 델(Michael Dell)이 이끄는 ‘델 테크놀로지스(Dell Technologies)’다. PC 조립업체라는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델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현대 IT 산업 생태계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델은 오늘날 엔비디아의 최고 동맹군이자 전 세계 기업들의 AI 전환을 현장에서 직접 실행해 내는 ‘AI 인프라의 대왕’으로 확고히 군림하고 있다.
델 테크놀로지스의 장대한 역사는 미국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의 한 허름한 기숙사 방에서 시작되었다. 1984년,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부모의 뜻에 따라 의예과에 입학했던 19세 청년 마이클 델은 전공 서적 대신 컴퓨터 부품과 납땜 인두를 쥐었다. 그가 손에 쥔 초기 자본금은 단돈 1,000달러에 불과했다. 마이클 델은 당대 컴퓨터 시장의 비효율성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았다. 당시 IBM을 비롯한 주류 컴퓨터 제조사들은 복잡한 다단계 유통망과 대리점을 거쳐 소비자에게 제품을 판매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유통 마진과 재고 비용이 붙어 컴퓨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마이클 델은 중간 유통상을 완전히 걷어내고 소비자의 주문을 직접 받아 원하는 사양대로 조립해 배송하는 ‘D2C(Direct-to-Consumer) 주문 제작(Build-to-Order)’ 모델을 세계 최초로 창안했다. 부품을 미리 쌓아두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조립하는 ‘적시 생산(Just-In-Time)’ 시스템을 결합하자 재고 비용은 제로에 수렴했고, 제품 가격은 파격적으로 낮아졌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PC’s Limited’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작은 벤처는 설립 첫해에만 6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사명을 ‘델 컴퓨터(Dell Computer Corporation)’로 변경한 뒤 1988년 나스닥 시장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파죽지세로 성장한 델은 1992년 마침내 미국 경제지 <포춘(Fortune)>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당시 마이클 델의 나이는 불과 만 27세였다. 이는 포춘 500대 기업 역사상 ‘최연소 CEO’라는 불멸의 대기록이었으며, 월가와 전 세계 IT 업계에 거대한 충격파를 던졌다. 델은 2000년대 초반 컴팩(Compaq)과 HP를 제치고 글로벌 PC 시장 점유율 1위에 등극하며 명실상부한 ‘PC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영원할 것 같았던 PC 왕국에도 거대한 위기가 닥쳐왔다. 2000년대 후반 애플의 아이폰 출시와 함께 스마트폰 및 태블릿 중심의 모바일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전통적인 데스크톱과 노트북 PC 시장은 급격한 역성장의 늪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대만의 에이서(Acer), 아수스(ASUS), 중국의 레노버(Lenovo) 등 저가 공세를 앞세운 아시아 제조사들의 추격으로 PC 사업의 수익성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월가의 투자자들은 매 분기 실적 발표 때마다 델을 향해 가혹한 비판을 쏟아냈다. 상장기업의 숙명인 단기 주가 관리와 배당 압박에 얽매여 있는 한, 근본적인 사업 체질 개선을 위한 대규모 R&D나 장기적 투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마이클 델은 자본시장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담하고도 충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바로 ‘자진 상장폐지(Going Private)’였다. 2013년 마이클 델은 글로벌 사모펀드 실버레이크(Silver Lake)와 손을 잡고 약 250억 달러의 자금을 투입해 유통 주식을 전량 매수, 25년간 머물렀던 뉴욕 증시에서 스스로 퇴장했다. 당장의 주가 등락과 월가의 간섭에서 벗어나 회사를 단순 하드웨어 조립업체에서 ‘기업용 엔터프라이즈 IT 솔루션 거인’으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겠다는 승부수였다.
비공개 기업으로 전환한 마이클 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2015년 10월, 델은 IT 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인 670억 달러(약 75조 원)를 베팅하여 글로벌 엔터프라이즈 스토리지 제왕 EMC와 그 자회사이자 클라우드 가상화 기술의 독점자였던 브이엠웨어(VMware)를 전격 인수 합병했다. 뉴욕증시 시장은 천문학적인 인수 부채를 우려하며 비관론을 쏟아냈지만, 마이클 델의 안목은 정확했다. 델의 강력한 x86 서버 하드웨어 제조력에 EMC의 기업용 스토리지 기술, 그리고 VMware의 클라우드 가상화 역량이 하나로 결합되면서 오늘날의 ‘델 테크놀로지스’가 탄생했다.
성공적인 체질 개선과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완료한 델은 2018년 12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화려하게 재상장하며 시장으로 복귀했다.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본 마이클 델의 구조조정 드라마는 글로벌 경영학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 회생 및 턴어라운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체질 개선을 마친 델 테크놀로지스의 진가는 2022년 말 챗GPT의 등장과 함께 폭발한 생성형 AI 혁명에서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빅테크 기업들과 전 세계 엔터프라이즈 기업들이 AI 모델 개발을 위해 엔비디아의 최첨단 GPU를 확보하려는 이른바 ‘GPU 쟁탈전’에 돌입했을 때, 시장의 병목현상은 칩 확보 자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수천, 수만 개의 고전력 GPU가 뿜어내는 막대한 열기를 어떻게 식힐 것인가, 페타바이트(PB) 단위의 방대한 데이터를 어떻게 지연 없이 GPU로 전송할 것인가, 그리고 복잡한 AI 인프라를 개별 기업의 데이터센터에 어떻게 안정적으로 구축할 것인가가 핵심 난제로 떠올랐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델 테크놀로지스가 AI 생태계의 구원투수로 등극했다. 엔비디아의 창업자 겸 CEO인 젠슨 황(Jensen Huang)은 공식 석상과 주요 기조연설 때마다 델을 향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젠슨 황은 델 테크놀로지스 월드(DTW) 무대에 직접 올라 마이클 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엔드투엔드 AI 시스템을 전 세계 엔터프라이즈 기업에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기업은 델 테크놀로지스가 유일무이하다”고 단언했다. 엔비디아와 델의 협력은 단순한 부품 구매와 완제품 조립 관계를 넘어선 ‘기술적 밀착 동맹’이다. 양사는 공동으로 ‘델 AI 팩토리 위드 엔비디아(Dell AI Factory with NVIDIA)’라는 통합 솔루션을 출범시켰다. 이는 엔비디아의 최신 GPU 아키텍처(블랙웰, 호퍼 등)와 스펙트럼-X(Spectrum-X) 이더넷 네트워킹, 델의 파워에지(PowerEdge) 초고성능 AI 서버, 파워스케일(PowerScale) 초고속 데이터 스토리지 및 AI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를 단일 패키지로 통합한 턴키(Turn-key) 시스템이다.
기업들은 복잡한 하드웨어 조립이나 호환성 검증을 거칠 필요 없이, 델의 AI 팩토리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즉각적인 AI 모델 학습과 미세조정(Fine-tuning), 추론(Inference) 워크로드를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인공지능 생태계의 가치사슬(Value Chain)을 분석해 보면 델 테크놀로지스가 차지하는 위상과 기능적 중요도는 독보적이다.
첫째, AI 하드웨어 랙 스케일(Rack-scale) 통합 및 냉각 엔지니어링의 표준 제시다. 최신 AI 서버 랙은 하나의 무게만 수 톤에 달하고 전력 소모량은 수십~수백 킬로와트에 이른다. 델은 공랭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직접 액체 냉각(DLC, Direct Liquid Cooling) 기술을 고도화하여 파워에지 AI 서버군에 완벽히 적용했다. 반도체 칩이라는 두뇌를 물리적인 서버 랙이라는 신체로 완벽히 구현해 내는 엔지니어링 기술력에서 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둘째, 온프레미스(On-Premise) 및 소버린 AI(Sovereign AI) 시장의 지배자 역할이다. 모든 기업이 자사의 기밀 데이터와 핵심 지적재산을 퍼블릭 클라우드에 올릴 수는 없다. 금융, 의료, 국방, 제조 등 핵심 산업군과 각국 정부 기관은 데이터 주권과 보안을 위해 자체 사내 데이터센터(온프레미스)에 프라이빗 AI 인프라를 구축하길 원한다. 델은 전 세계 180여 개국에 걸쳐 구축된 강력한 B2B 직판망과 엔터프라이즈 컨설팅 조직을 통해 이들 기업에 최적화된 맞춤형 프라이빗 AI 시스템을 공급하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셋째, 데이터 병목을 해소하는 고성능 스토리지 인프라 공급이다. AI 모델 훈련에서 연산 속도만큼 중요한 것이 데이터의 입출력(I/O) 속도다. 델의 비정형 데이터 스토리지 파워스케일(PowerScale)은 엔비디아의 슈퍼팟(DGX SuperPOD) 인증을 획득하며 AI 워크로드의 데이터 병목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델 테크놀로지스의 역사는 끊임없는 혁신과 파괴적 결단의 연속이었다. 대학 기숙사 방에서 1,000달러로 시작해 PC 유통의 패러다임을 바꾼 청년 창업가는, 상장폐지와 대규모 M&A라는 승부수를 거쳐 이제 전 세계 AI 인프라를 지휘하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인공지능 혁명이 심화될수록 화려한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의 이면에서 이를 묵묵히 떠받치는 하드웨어 인프라의 가치는 더욱 절대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최첨단 반도체라는 원자재를 전 세계 산업 현장이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완성형 컴퓨팅 파워로 탈바꿈시키는 델 테크놀로지스의 제조·공급망 역량과 엔터프라이즈 장악력은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이다. 마이클 델과 델 테크놀로지스가 써 내려가는 AI 인프라 대왕의 신화는 이제 막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